대구광역시는 오래전부터 물류와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하지만 그 중심부에서 한 세기를 넘도록 같은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장소는 많지 않습니다. 대구 약령시는 그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입니다. 이 거리는 단순한 한약재 시장이 아닙니다. 약재를 사고파는 장소 너머에, 지역과 시대가 쌓은 기억이 켜켜이 남아 있는 역사적 거리입니다. 이번 글은 약령시를 단순 관광지나 먹거리 골목이 아닌 기억이 퇴적된 장소로 바라보며, 거리의 시간성과 감각, 그리고 그 안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350년 역사를 견뎌온 거리의 구조와 결
대구 약령시는 1658년 조선 효종 때 처음 시작된 약령시장에서 유래합니다. 당시는 지금처럼 상설 시장이 아니라, 해마다 봄이 되면 열리던 임시 장터의 형태였습니다. 전국의 약초상과 한의사, 중개인이 대구로 모여 장을 열고 거래를 하며 약령 문화가 꽃피었습니다. 이 전통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산업화를 거치며 자리를 옮기고 형태를 바꾸었지만, 여전히 한약재 유통의 중심지라는 본질은 유지되고 있습니다.
현재의 약령시는 대구 중구 남성로 일대에 위치해 있으며, 그 중심에는 대구약령시한의약박물관과 ‘약령시 한방문화축제’라는 연례행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약령시는 그 축제나 전시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좁은 골목 사이, 창문 없이 빽빽이 쌓인 약재 박스, 쓰지 않는 저울과 손때 묻은 계량 도구에서 이 거리의 결이 느껴집니다. 약재 향이 코끝을 자극하고, 진열대 위엔 여전히 직접 그린 손글씨 간판이 걸려 있습니다. 도시가 빠르게 회전해도, 이 거리만은 그 속도를 거부하듯 제 속도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관광지가 되지 못한 전통, 혹은 되지 않기를 바라는 거리
약령시는 최근 들어 그 모습이 조금씩 변하고 있습니다. ‘약령시한방거리’라는 이름으로 관광자원화가 진행되었고, 현대적인 건물 리모델링과 디자인 간판, 체험 공간이 도입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거리의 진짜 정체성은 오히려 그 반대쪽에 있습니다. 많은 관광객들이 약령시장 인근 한의원 체험관을 통해 약차를 마시고, 족욕 체험을 하지만, 진짜 약령시를 이루는 건 골목 안쪽의 실제 약재상들입니다. 이곳에서 일하는 상인들은 대부분 세대를 이어 같은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관광객의 방문보다는 단골 약사나 한의사, 그리고 소규모 유통업체와의 거래가 더 중요합니다. “사진 찍지 마세요."라는 말 대신 무언의 거절이 감도는 표정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낯선 이방인의 호기심을 경계하기보다, 이곳이 여전히 ‘일하는 거리’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태도입니다.
‘전통을 지킨다’는 말은 쉽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전통은 ‘보존’이 아니라 현장성, 실질성, 경제성이라는 조건 위에서 존재합니다. 약령시는 유물처럼 박제된 전통거리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삶의 터전입니다. 이 거리가 관광지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이곳은 여전히 거래가 이루어지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약령시에서 발견한 도시의 숨결과 한약의 감각
이 거리의 강렬한 약재 냄새는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거북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걷다 보면, 그 향 안에는 수백 가지 식물의 말린 뿌리, 줄기, 잎, 껍질, 열매가 섞여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향은 거리 전체를 하나의 약장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사거리 모퉁이를 돌면 홍삼과 감초가 섞인 듯한 단내가 풍기고, 한참을 걷다 보면 초본류 약재의 쌉싸래한 향이 목을 타고 내려옵니다. 진열대엔 여전히 목편으로 만든 손계량기가 놓여 있고, 벽면엔 ‘2022년산 천궁 완판’ 같은 작은 팻말이 붙어 있습니다. 디지털화되지 않은, 아날로그의 질감이 이 거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한의학이 현대의학과 함께 공존하는 시대지만, 이 거리에선 여전히 ‘약은 몸에 맞게 지어야 한다’는 말이 살아 있습니다. 길을 걷는 중간중간, 작은 약방들이 줄지어 자리하고 있고 그 안에는 오래된 책상과 유리병, 손때 묻은 조제 노트가 놓여 있습니다.
거리 끝자락에 다다르면, 한약 냄새도 희미해지고 그 경계에서 다시 대구의 빠른 도심이 시작됩니다. 약령시는 그렇게 대구라는 도시의 ‘속도’와 ‘기억’이 교차하는 접점에 있습니다. 지금 이 거리를 걷는 것은, 단지 상점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한국 근현대 한방 산업의 작은 단면을 통과하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구 약령시를 돌아보며 가장 강하게 느낀 것은 ‘살아 있다’는 감각이었습니다. 그곳은 과거가 머물러 있는 곳이 아니라, 현재가 계속 작동하고 있는 생생한 일터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약령시를 단순히 ‘전통시장’이라 말하지만, 사실 이곳은 한국에서 몇 안 되는 현존하는 한방 유통 구조의 중심지입니다. 박물관보다 깊고, 축제보다 진짜인 공간.
다음에 대구에 간다면 한 끼 식사 전에, 혹은 유명 관광지를 돌기 전에 약령시 골목을 걸어보길 권합니다. 그 향기와 풍경은 오래 머릿속에 남을 것이고, 그 기억은 단순히 ‘여행의 일부’가 아니라, 한 도시가 몸으로 쌓아온 시간을 통과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