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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덕 향기 따라간 마을길

by parttime1 2025. 7. 23.

팀으로 식물을 키우는 사진
팀으로 식물을 키우는 사진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은 광산이 사라진 후 새로운 생계를 모색하던 마을이었습니다. 이곳은 해발 700미터가 넘는 고지대이며, 일교차가 크고 흙은 단단하지만 배수가 잘되는 곳으로 바로 그 조건이 더덕이라는 뿌리식물에게는 이상적인 땅이 됩니다. 수십 년 전부터 이곳 주민들은 마을 공동체 단위로 더덕을 심기 시작했고, 지금은 ‘더덕 하나로 사는 마을’이라 불릴 만큼 정체성이 분명한 마을이 되었습니다.

관광지로서의 화려함은 없지만 이 마을은 매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더덕 수확철이 되면 흙냄새와 함께 사람 냄새가 풍기는 곳입니다. 이 글은 그 마을에서 하루를 머물며 관찰한 풍경, 사람, 그리고 더덕이 만들어낸 관계에 관한 기록입니다.

땅을 파야 보이는 작물, 더덕

더덕은 흙 위로는 아무 것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잎사귀와 줄기만 보기에는 그 아래 뿌리가 얼마나 컸는지, 얼마나 깊이 자랐는지를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더덕 농사는 파종보다 수확이 더 힘들다고들 합니다. 마을 주민은 “더덕 농사는 기다림의 농사”라고 말합니다. 심고 나면 최소 3년은 뽑지 않아야하고 짧은 농기계로는 캐낼 수 없어 일일이 손으로 파내야 합니다. 그래서 더덕은 ‘노동의 작물’입니다.

고한읍 일대에서는 마을 협동조합 단위로 더덕 농사를 운영합니다.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가족이 한 구획을 책임지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공동체 농업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노동도 나눌 수 있고, 수확 후 판로도 마을 자체적으로 운영합니다. 비료는 최소화하고, 산 속에서 내려오는 물을 그대로 끌어 쓰는 덕분에 이 지역의 더덕은 향이 깊고 질감이 단단하기로 유명합니다.

무엇보다 특이한 점은 ‘더덕을 캐는 여행’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입니다. 매년 9월 말부터 10월 중순까지는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되는데, 직접 장화를 신고 밭에 들어가 뿌리를 캐보는 방식입니다. 흙을 뒤집고 손에 묻히는 경험을 통해 더덕이라는 작물이 가진 생장력과 그 뿌리의 힘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수확이 아니라, 작물과 노동의 시간을 함께 느끼는 시간인 셈있니다.

한 그루가 밥상이 되다

더덕은 다양한 요리에 쓰이지만, 이 마을에서는 ‘더덕 밥상’이라는 고유한 음식 문화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더덕구이, 더덕무침, 더덕튀김, 심지어 더덕청까지 직접 만드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숯불 더덕구이입니다. 숯 위에 얇게 편 더덕을 구워 간장양념을 바르고 먹으면, 특유의 쌉싸름함과 달큰한 향이 어우러집니다.

숙소 인근의 한 가정식 식당에서는 계절마다 바뀌는 반찬과 함께 ‘더덕 4종 세트’를 제공합니다. 반찬 하나하나에 마을의 방식이 스며 있습니다. 고추장을 넣지 않고 자연 발효 간장으로만 무친 더덕무침, 마른더덕을 불려 튀긴 더덕강정, 꿀 없이 더덕즙만으로 졸인 더덕청. 이 음식들은 단순히 요리가 아니라, 더덕이 귀해지는 계절을 견디는 기술입니다.

여행자에게 이 음식은 신기한 체험이 되지만, 마을 주민에게는 일상입니다. 더덕은 이 마을에서 '돈이 되는 작물'일 뿐만 아니라, 계절을 이어주는 식탁의 중심입니다. 마을의 밥상은 곧 땅의 결과물이며, 더덕은 그 사이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입니다.

 

더덕으로 연결된 사람들

이 마을에는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외지에서 귀촌한 이주민 비율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도시에서 퇴직하거나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처음엔 낯설었지만, 더덕 농사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끈이 되었습니다. 같은 밭에서 작업하고, 같은 날 장에 내다 팔고, 같은 밥상에 둘러앉으며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마을에는 더덕 연구회를 자처하는 소모임도 있습니다. 1세대 농민이 젊은 귀촌자들에게 씨앗 고르는 법, 땅 다지는 법을 가르치고, 귀촌자들은 마을 브랜딩, SNS 홍보, 체험 프로그램 기획 등을 맡으며 서로의 재능을 나눕니다. 공동체 안에서 역할을 나누며 생존뿐 아니라 정체성과 방향까지 함께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더덕 하나를 중심으로 구성된 이 관계망은 단단합니다. 단순한 작물 재배를 넘어, 교육과 실험, 체험과 나눔이 공존하는 이 마을의 여행은 유명 관광지나 핫플레이스가 아니라, ‘살아가는 장소에 잠시 머무는 체험’으로 구성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짜 여행의 감각을 되찾게 만들어 줍니다.

 

더덕은 땅속에 숨어 있는 작물이라서 그 모습을 알기 위해선 직접 땅을 파야 하고,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이 마을의 여행도 마찬가지입니다. 겉보기엔 특별할 것이 없지만 조금만 머무르면, 식탁과 흙, 사람과 시간 사이에 연결된 고리를 볼 수 있습니다. 더덕은 단지 향이 강한 뿌리식물이 아니라, 마을을 구성하고 여행자를 초대하는 하나의 매개체입니다.

자극적인 관광지보다 조용한 농촌, 짧은 스냅사진보다 깊은 관찰, 더덕 마을의 여행은 우리에게 ‘천천히 보고, 오래 기억하는 방식’을 가르쳐줍니다. 만약 당신이 이제 조금 다른 방식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이 더덕 향기 가득한 마을이 좋은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