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지나치는 여행보다, 머무는 여행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많은 것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여행, 조용히 시간을 보내며 공간을 음미하고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이번 여행은 조금 특별하게 단 하나의 조건만 두었습니다. ‘도서관만 가보자.’ 관광지도, 카페도, 맛집도 제외하고 오직 도서관이라는 공간에서 머물기로 했습니다. 충청도와 전라도 사이에서 고른 세 도시, 예산, 보은, 고창. 이 세 곳의 공공도서관을 직접 방문해 지역과 공간의 분위기를 글과 감각으로 기록해 보았습니다. 도서관이 단순한 독서 공간을 넘어 각 지역의 문화 경험이 된다는 걸 이 여행에서 확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1. 예산군립도서관 – 배려하는 질서와 지역의 기록
예산군립도서관은 예산역에서 도보 10분 거리, 군청과도 가까운 위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3년의 리모델링 공사를 마치고 2024년 재개관한 예산군립도서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의 규모를 자랑하며 1층 전체를 어린이들을 위한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들어 놓을 만큼 아이 친화적인 곳입니다. 1층 중앙홀의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의자와 책상을 비치하여 아이들이 언제든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고 안쪽으로는 도서관에선 잘 볼 수 없는 놀이 공간도 있습니다. 종합 자료실과 일반 열람실을 2층과 3층에 두어 아이들의 소음에 방해받지 않고 독서를 즐길 수 있도록 설계된 구조도 인상적입니다. 이 도서관은 '지역 중심의 문화 정보 플랫폼'처럼 느껴집니다. 인상 깊었던 건 '예산 문화 아카이브' 코너였습니다. 예산 출신 인물과 지역사 사진, 과거 읍내 지도 등이 책장 한 켠에 전시돼 있어 도서관이 지역 기록의 거점이기도 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후 3시 무렵 도서관은 예상외로 시끌시끌합니다. 노인들과 아이들을 위한 문화교실이 도서관 곳곳에서 열리기 때문입니다. 조용하지만 멈춰 있지 않은 공간. 예산군립도서관은 ‘공공 공간’이라는 말이 정확히 어울리는 장소였다.
2. 보은교육도서관 – 즐거운 쉼터
보은교육도서관은 규모가 작습니다. 터미널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초등학교 옆에 위치하여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드나들기에 좋습니다. 외관은 깔끔한 흰색 건물이며, 규모는 크지 않지만 층별로 짜임새있게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내부는 1층에 유아열람실과 어린이 자료실, 2층에 종합자료실, 3층에 놀터 꿈터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일반 도서관들과 달리 1층 안내데스크에서 보드게임을 대여해 주고 2층에는 1인 미디어 시청 공간도 있어서 아이들에게 도서관은 책만 읽는 곳이 아니라는 인식을 가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보은교육도서관은 ‘즐거운 생활공간’에 가깝습니다. 학생들과 지역 주민들이 각자 취향에 맞는 자리를 채우고 있었고, 창밖으로 보이는 숲의 풍경이 마음을 느긋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책장은 높지 않고, 주제 분류가 잘 되어 있어 동네도서관으로서의 실용성과 편안함이 느껴졌습니다. 읽기 위해 일부러 찾아간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책 보다 공간 그 자체를 즐기러 온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아이들이 보드게임 하는 소리, 꿈터에서 토론하는 소리, 그리고 천천히 넘기는 책장 소리. 보은정보도서관은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가진 ‘쉼터’였다.
3. 고창군립도서관 – 설계가 돋보이는 지역 문화공간
고창군립도서관은 세 도서관 중 가장 규모가 크고 현대적인 공간이입니다. 고창읍 시가지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으며, 외관은 유리와 금속 소재가 어우러진 현대적인 건축 양식입니다. 도서관 외부의 공원 역시 규모가 있는 편이고 잔디와 나무가 잘 관리되어 있어서 고창군립도서관이 지역에서 가지는 의미를 알 것 같았습니다. 내부는 채광이 매우 좋았고, 통유리 창 너머로 마을과 산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좌석 배치가 개방적이며, 복층 구조를 활용해 공간을 입체적으로 나눈 점도 인상 깊었습니다. 무엇보다 감동적이었던 건 1층 로비의 ‘열린 전시공간’입니다. 고창 지역 작가들의 사진, 그림, 시화가 전시되어 있고, 계절에 맞춘 테마별 북큐레이션이 자유롭게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책을 읽는 공간이 아니라, 지역 문화와 예술이 교차하는 플랫폼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입니다. 관람객들은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아이들은 동화책을 꺼내 앉아 자연스럽게 페이지를 넘깁니다. 공공도서관으로써 접근성과 개방성이 뛰어나며, 지역민에게도 여행자에게도 모두 열린 장소로 느껴졌습니다. 도서관이 이렇게 아름답고 다른 분야에 유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창군립도서관은 ‘공간 자체가 콘텐츠’였고, 그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하나의 경험이었습니다.
이번 기록은 특별한 관광지 없이 세 곳의 도서관만을 다녀온 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단조롭거나 심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용한 공간에서 사람의 리듬, 책장의 온도, 창밖의 빛을 천천히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예산은 기록의 중심이었고, 보은은 쉼의 공간이었으며, 고창은 확장된 감각의 플랫폼이었습니다. 도서관은 정보를 얻는 곳이지만, 그 안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여행의 깊이를 만들어줄 수 있습니다. 지역을 이해하고 싶다면, 먼저 그 지역의 도서관에 가보십시오. 그곳엔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 지역의 풍경이 숨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