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도주리는 지도로 보면 작은 시골 마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지명부터가 방언의 흔적을 품고 있습니다. ‘도주(道舟)’라는 이름은 지역 사투리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깊은 골짜기 아래로 흘러가는 물줄기 또는 ‘배처럼 눕는 땅’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이 마을은 단순히 조용한 농촌이 아니라, 언어와 지형, 그리고 사람들의 삶이 맞물려 살아 움직이는 공간입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사라져 가는 말과 함께, 그 말속에 남은 마을의 이야기를 따라가 봅니다.
도주라는 말, 사라진 언어의 지형
도주리라는 이름을 처음 들으면 낯설게 들립니다. 행정 지명은 '도주(道舟)'로 표기되지만, 이곳 사람들은 ‘도지’나 ‘도주지’라고 부릅니다. 이는 경상북도 남부 지역에서 쓰이는 방언 구조의 흔적이 남은 것으로, 실제로 ‘도주’는 ‘도랑이 배처럼 눕는 땅’ 혹은 ‘물이 모여드는 골짜기’를 뜻하는 옛 말로, 청도 지역 어르신들은 이 표현을 자연스럽게 사용해 왔습니다.
지형을 보면 그 말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도주리는 고개 너머 낮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마을입니다. 남쪽으로 완만한 개울이 흐르고, 북쪽은 산으로 막혀 있어, 실제로 땅 전체가 ‘오목하고 길게 이어진 그릇’ 같습니다. 예전엔 논농사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밭과 과수원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마을 입구에는 70년대에 설치된 자연 암반 우물이 남아 있어서 ‘도주’라는 지형 개념을 실감하게 해주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지명과 말은 단지 상징이 아닙니다. 마을 안에는 ‘도주터’, ‘도지개’, ‘윗도주’ 같은 세부 지명이 남아 있습니다. 이처럼 방언은 단지 언어가 아닌 ‘지형 감각의 언어화’로 존재합니다. 사람들은 지명을 부르며 땅의 형태를 기억하고, 그 기억은 말속에 남게 됩니다. 이 말들이 사라지면 지형의 감각도 함께 희미해집니다. 지금 도주리에서 방언을 말할 수 있는 어르신은 점점 줄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말의 소멸이 아니라, 공간의 망각으로 이어질지도 모릅니다.
말하는 마을, 듣는 기록
도주리의 또 다른 특별함은, 마을 전체가 아직 ‘말로 기억되는 장소’라는 점입니다. 이곳은 디지털 정보보다 구술 정보가 훨씬 많습니다. ‘조암댁’, ‘할매집 앞 우물’, ‘황 소 죽인 자리’ 같은 장소들이 공식 지도에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어르신들의 대화에서는 실시간으로 오고 갑니다. 이는 구술 문화의 진면목이자, 사라져 가는 감각 기록의 원형입니다. 실제로 마을 경로당에서는 아직도 경북 사투리 특유의 억양과 단어들이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습니다. “거가 뭐라꼬, 얘 봐라잉, 그마이 아그가 지고 왔다 아이가” 같은 말들은 서울말로 번역하기 어려운 의미와 정서를 담고 있습니다. 대화에는 과거와 현재가 혼재되어 있으며, 말의 억양만으로도 발화자의 감정과 역할이 구분됩니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처음엔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루 이틀 머물면 이 말의 리듬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리듬 속에 마을의 구조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말은 장소에 뿌리를 내리고, 장소는 말로 전해집니다. 도주리는 그런 점에서 ‘보는 마을’이 아니라 ‘듣는 마을’입니다. 이 듣는 감각이야말로, 여행자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경험이 됩니다.
변화하는 마을, 변하지 않는 말
요즘 도주리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2010년대 초반만 해도 마을 앞 대부분이 논이었지만, 지금은 주택지가 늘었고 근처 대도시에서 이사 온 귀촌인 가구도 하나둘 생겼습니다. 젊은 세대는 적고, 마을 아이들은 대부분 청도읍이나 대구에서 학교를 다닙니다. 하지만 마을의 말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경로당, 마을회관, 우물가, 논두렁에서 오가는 말은 방언 그대로입니다.
특히 도주리는 청도 방언 중에서도 억양이 강한 지역으로, 주변 면과도 차이가 있습니다. “아잉교”, “이시더라”, 뭐라카노” 같은 표현은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말하는 방식 전체를 포함합니다. 귀촌 세대도 처음엔 말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이 언어 속에 있는 관계망을 이해하게 됩니다. 언어가 곧 문화이고, 공동체를 묶는 끈인 것입니다.
마을 이장은 말합니다. “지금이 제일 조용해 보이지만, 우린 옛날처럼 계속 말하고 살아요.” 실제로 도주리는 SNS도 블로그도 거의 없는 마을이지만, 그만큼 모든 기록이 말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을 수 있다면, 그 마을을 온전히 만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주리는 작고 조용하지만, 언어의 밀도로는 매우 두터운 장소입니다. 여행자는 그 안에서 삶의 언어를 체험하게 됩니다.
도주리는 지도에서 작게 보이지만, 그 이름 하나에 수십 년의 말과 땅의 기억이 담겨 있습니다. ‘도주’라는 지명은 말로 전해지고, 말은 삶의 리듬으로 이어집니다. 이 마을은 관광지를 가진 것도, 유명한 먹거리를 가진 것도 아니지만 말이 있는 마을, 말이 지형을 설명하는 마을임에 틀림없습니다. 청도 도주리는 여행자에게 알려줍니다. 보지 않고, 듣고, 기록하는 방식으로 마을에 머물러야 한다고. 그들의 말은 우리에게 땅의 기억이 어떻게 살아있는지를 알려줍니다. 말이 사라지지 않도록,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