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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디날루완에서 회복을 배우다

by parttime1 2025. 7. 18.

폭풍우 치는 해안
폭풍우 치는 해안

 

 

필리핀 레이테 남부 해안에 위치한 조용한 섬, 디날루완(Dinlawaan). 이 섬은 태풍 ‘욜란다(Yolanda)’의 상흔을 고스란히 겪은 지역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수년이 흐른 지금, 이 작은 섬은 복원이라는 단어 그 이상의 감동을 품고 있습니다. 물리적 복구가 아닌, 사람들의 감정, 공동체, 기억까지 회복해 낸 장소. 디날루완은 자연재해 이후 삶이 어떻게 다시 피어나는지를 직접 보여주는, ‘살아 있는 회복의 섬’입니다.

새벽 바다에서 다시 시작된 삶

디날루완은 여전히 어촌입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바다를 대합니다. 태풍 욜란다로 바다에 나가던 배들은 모두 침몰하거나 찢어졌고, 오랜 시간 동안 주민들은 바다를 바라보기만 할 뿐,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젊은 어부 셋이 폐자재를 모아 첫 배를 만들었습니다. 못이 부족해 대나무 줄기로 묶고, 돛 대신 나무판을 얹어 만든 그 배는 ‘다시 시작하는 상징’이 되었고, 마을 전체가 그 모습을 따랐습니다. 지금의 디날로완엔 그들이 만든 12척의 공동 배가 운영되고 있으며, 어획물은 개인 소유가 아닌 공동 판매, 공동 배분 구조를 따릅니다.

그 바다의 새벽은 다릅니다. 고요하지만 힘차고, 잃었던 것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선 용기가 서려 있습니다. 마을 초입엔 'Hope doesn’t drown'(희망은 가라앉지 않는다)라고 적힌 작은 간판이 그날 이후 계속 걸려 있습니다.

방풍림과 바람막이 대나무, 마을이 만든 생태의 방패

태풍 이후, 마을 사람들은 집보다 먼저 나무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디날로완의 독특한 풍경 중 하나는, 섬을 감싸듯 둘러싼 방풍림입니다. 바나나, 팜, 닐라드 같은 토종 나무들이 일정 간격으로 자라고 있고, 이 나무들은 단순한 조경이 아니라, 자연재해로부터 공동체를 지키는 첫 번째 장벽입니다. 또한 해안가에는 바닷물의 침입을 막기 위한 대나무 펜스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 펜스는 강풍이나 높은 파도에 쉽게 무너지지만, 태풍 전 징후를 알려주는 자연 알림 장치처럼 사용됩니다. 바람이 강해지면 바닷물이 대나무를 넘어뜨리기 시작하고, 이때부터 마을은 자연스럽게 대비 체계로 전환됩니다. 어린아이들은 나무 아래 그늘에서 놀고, 어르신들은 해안 대나무 울타리의 상태를 보고 바람의 방향을 예측합니다. 이처럼 디날로완은 자연과 사람, 그리고 지혜로 공존하는 섬입니다.

그들만의 회복 방식

디날루완의 골목을 걷다 보면 이 마을이 단순히 복원된 공간이 아니라 기억과 감정까지 회복한 마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을 중앙 커뮤니티 센터 벽에는 그림이 붙어 있습니다. 아이들이 그린 태풍 전의 마을 모습과, 지금의 마을 모습이 나란히 걸려 있습니다. 그림 속 사람들은 울고 있지 않습니다. 대신 나무를 심고, 바구니를 들고, 다시 삶을 시작하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심지어 태풍 피해로 무너졌던 건물을 아예 ‘열린 쉼터’로 리모델링하기도 했습니다. 벽을 모두 허물고 나무 벤치를 두었으며, 지금은 아이들의 놀이 공간이자 노인들의 바둑판이 놓인 낮은 마루가 되었습니다.

디날루완의 여행은 단순한 ‘구경’이 아닙니다. 이 섬에선 방문자에게 숙소보다 먼저 공동 식사에 초대합니다. 마을 부엌에서 해산물과 채소로 만든 집밥을 함께 먹고, 식사 후엔 주민들과 대화하거나, 직접 복원 작업을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중 가장 의미 깊은 시간은 ‘이야기 나눔 모임’입니다. 매주 한 차례, 마을 광장에 모여 돌아가며 태풍 이후 자신이 겪은 경험을 나누고, 웃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위로하는 이 자리는 방문자에게도 함께 기억에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 됩니다. 이런 프로그램은 돈을 벌기 위한 관광 콘텐츠가 아니라, 디날로완이 배운 회복의 방식을 세상과 나누는 방식입니다. 이곳에선 당신도 ‘관광객’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받아들여집니다.

 

디날루완은 화려한 휴양섬이 아닙니다. 고급 숙소도, 유명 인플루언서도, 수백 개의 별점 리뷰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강한, 사람들의 마음이 만든 섬입니다. 무너졌던 마을이 다시 선 것은 콘크리트가 아니라, 함께 물을 나르고, 나무를 심고, 밥을 나누었던 공동의 기억 덕분입니다. 디날로완은 말합니다. 진짜 회복은 ‘다시 짓는 것’이 아니라, ‘다시 연결되는 것’이라고. 당신이 이 섬에 발을 디딘다면, 그 순간부터 당신 역시 그 회복의 한 조각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