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북부 루손 인근의 외곽 섬, 마라룩(Maraluk Island)은 관광보다 생계와 전통이 중심인 섬입니다. 이곳에서는 대대로 전해지는 전통 목선 ‘방카(Bangka)’ 만들기 문화가 오늘날에도 살아 있습니다. 기계와 공장이 아닌 사람의 손으로 이어지는 이 기술은 섬의 생존을 떠받치는 지혜이자, 지역 정체성 그 자체입니다. 이 글은 관광지로 알려지지 않은 마라룩 섬의 전통 배 제작 문화를 조명합니다.
나무에서 배가 되는 순간, 마라룩의 조선기술
마라룩 섬에서 배를 만드는 작업은 단순한 제작이 아니라 삶의 연장입니다. 이 지역의 조선 기술은 최소 3대 이상을 거쳐 구전되어 온 것으로, 섬 주민들은 별도의 설계도 없이도 손과 기억만으로 배를 짓습니다. 핵심은 지역에서 채취한 ‘나라(Narra)’나무나 ‘마호가니’와 같은 내구성 높은 목재의 선택입니다. 벌목은 마을 장로의 허가 아래 공동체 단위로 이루어지며, 배 하나를 만들기 위해 평균 3~4명이 2주 이상을 함께 작업합니다. 재료 손질은 대개 새벽 시간에 집중되며, 해가 뜨기 전 젖은 뿌리와 나무껍질을 벗기고, 햇빛이 강한 낮 시간에는 나무를 자연 건조시킵니다. 이 과정을 통해 뼈대를 틀어짐 없이 세울 수 있습니다. 이어서 뱃머리와 뒷부분의 균형을 잡는 ‘리바(Riba)’라는 기술이 적용되며, 이는 노인의 손에 의존하는 고난도 작업입니다. 부레 없이도 균형을 유지하는 전통 방카는 고기잡이뿐 아니라 폭우에도 강해, 마라룩 바다에서 수십 년 간 증명되어 온 생존 수단이자 문화 자산입니다. 또한 나무의 탄력성과 길이, 수분 함량까지 손으로 판단하는 기술은 단순한 기능을 넘어 경험의 집합체로 여겨지며, 이는 기계로 대체할 수 없는 감각적 전통으로 남아 있습니다.
전통 배와 공동체의 관계, 기술을 잇는 사람들
마라룩의 배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닌 ‘가족의 상징’입니다. 아버지가 만든 배를 아들이 손질하고, 손자가 그 배로 다시 바다에 나갑니다. 이처럼 전통 조선 기술은 세대를 잇는 끈이며, 섬 공동체의 생활 주기를 반영하는 핵심 도구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기술이 단순히 개인에게 귀속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한 사람이 배를 짓더라도, 이웃들이 나무를 자르고, 해체를 돕고, 축조 중엔 음식을 나눠주는 ‘배 협동 체계’가 자연스럽게 작동합니다. 배는 곧 섬사람 전체의 생계와 직결되며, 어업, 농업 운송, 응급 상황 대피 등 다양한 기능을 동시에 수행합니다. 특히 결혼을 앞둔 젊은이가 첫 배를 만들면, 마을에서는 그것을 ‘가족을 꾸릴 자격’으로 여기는 전통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지역 청년들이 NGO와 함께 ‘배 만들기 교육 프로그램’을 시작해, 기술의 단절을 막고 있습니다. 일부 관광객은 단순한 배 탑승이 아닌, 직접 제작에 참여해 보는 ‘문화체험’으로 이곳을 찾기도 합니다. 이처럼 마라룩의 배는 기술이면서도 공동체 그 자체입니다. 더 나아가 전통 배 제작 과정은 사람 사이의 신뢰와 협업을 필수로 요구하며, 이를 통해 지역 내 연대감과 공동체성도 강화됩니다. 배 하나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곧 마을 전체가 함께하는 서사로 확장됩니다.
산업화의 파도 속, 마라룩 배의 지속 가능성
최근 몇 년 사이, 필리핀 해안가를 중심으로 플라스틱 배나 알루미늄 소형 보트가 빠르게 보급되며 전통 방카의 수요는 줄고 있습니다. 심지어 정부의 어선 보조금 정책도 대부분 공장제 제품에만 집중되며, 마라룩처럼 손으로 짓는 배는 경쟁에서 밀리는 형국입니다. 하지만 마라룩 섬 주민들은 여전히 나무배를 선택하고, 그 배로 바다를 나갑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전통 배는 해류를 읽고, 파도에 흔들리지 않는 구조적 설계를 지녔으며, 수리와 교체가 용이하고 유지비도 저렴합니다. 무엇보다 이 배에는 누군가의 손과 가족의 기억이 새겨져 있어, 단순한 탈 것이 아니라 ‘생활의 일부’로 여겨집니다. 환경 측면에서도 플라스틱 부력제를 사용하지 않는 방카는 바다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이 작고, 자연 재료로 만들어 생애주기 후에도 분해됩니다. 이를 통해 마라룩의 조선 문화는 현대 생태윤리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최근에는 친환경 관광 자원으로도 주목받으며, 소규모 장인 배 제작소가 문화 자산 등록을 추진 중입니다. 이와 더불어 배 제작 과정이 영상 콘텐츠나 공정여행 프로그램으로 전환되며, 전통 기술이 지역 경제에 다시 기여하는 선순환 사례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마라룩 섬에서 배를 짓는다는 건, 단지 나무를 이어 붙이는 일이 아닙니다. 바다를 이해하고, 사람을 신뢰하며, 느린 시간을 통과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바람과 파도를 기억하는 나무들 위에, 세대의 손이 얹힐 때 그 배는 단순한 선박이 아닌 ‘기억을 실은 문화’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