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의 마라케시에서 남쪽으로 약 180km, 아틀라스 산맥의 비탈길을 넘으면 모래빛 성벽과 탑이 이어지는 마을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이곳이 바로 아이트벤하두(Aït Benhaddou). 11세기부터 형성된 카스르(ksar, 전통 흙벽 요새 마을)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지금은 세계적인 영화 촬영지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글래디에이터’, ‘왕좌의 게임’, ‘미션 임파서블’ 같은 작품 속 배경으로 등장하며 수많은 여행자를 끌어모았습니다. 그러나 화려한 스크린 속의 명성 뒤에는 전통 보존과 상업화 사이의 미묘한 긴장이 존재합니다.
카스르의 역사·건축학적 특성
아이트벤하두의 카스르는 흙과 짚, 돌을 섞어 만든 전통 건축물로, 사하라 사막과 아틀라스 산맥 사이의 교역로를 지키는 요새 역할을 해왔습니다. 카스르는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안에는 주거 공간, 곡물 창고, 모스크, 공용 광장이 자리합니다. 건물은 ‘타부트(tabut)’라 불리는 나무 기둥과 흙벽으로 구조를 지탱하고, 두껍게 발라진 흙은 낮에는 강한 햇볕을 차단하고 밤에는 열을 품어 기온차를 완화하는 기능을 합니다.
아이트벤하두의 건축미는 단순한 실용성에만 있지 않습니다. 기하학적인 흙벽 장식, 촘촘한 골목길, 지붕 위로 솟은 망루는 북아프리카의 전통과 아마지그(Berber) 문화가 집약된 형태입니다. 건물 벽면에 새겨진 문양과 기둥 장식은 단순한 미학적 요소를 넘어 공동체의 정체성과 신앙을 담고 있습니다. 이 마을은 세대를 거쳐 전해 내려온 전통 건축 기술의 산 증거이며, 지역 장인들은 여전히 흙을 빚고, 짚을 섞어 건물을 복원합니다.
그러나 이런 흙건축은 자연재해와 기후 변화에 취약합니다. 폭우나 바람, 그리고 현대식 재료의 대체로 인해 원형 보존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20세기 중반 이후 많은 주민이 현대식 마을로 이주하면서, 카스르 내부의 거주 인구는 급격히 줄었고, 일부 건물은 방치된 채 붕괴 위기에 놓였습니다. 유네스코 등 국제단체와 모로코 문화부는 이를 막기 위해 보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지만, 전통 건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재료·기술·노동력의 확보가 여전히 과제입니다.
영화 촬영과 관광의 유입
아이트벤하두가 세계 무대에 이름을 알린 것은 1960년대 이후입니다. 모래빛 성벽과 이국적인 풍광은 중세 혹은 사막 배경을 필요로 하는 서구 영화 제작자들에게 이상적인 로케이션이었습니다. ‘로렌스 오브 아라비아’ 이후 수십 편의 영화와 드라마가 이곳에서 촬영되었고, 일부 작품은 아이트벤하두를 실제 역사적 배경으로 착각하게 만들 정도로 사실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촬영팀의 유입은 지역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촬영 기간 동안 많은 주민이 엑스트라, 운송, 장비 설치, 음식 제공 등의 역할로 참여했고, 일부는 전문 가이드로 활동하며 새로운 직업을 얻었습니다. 특히 ‘왕좌의 게임’ 이후 젊은 여행자들의 방문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카스르 주변에는 게스트하우스, 카페, 기념품 가게가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상업화와 전통 보존의 충돌이 나타났습니다. 관광객 편의를 위해 콘크리트로 일부 건물을 개조하거나, 촬영 세트를 남겨두는 경우가 생기면서 원래의 흙건축 양식이 변형되었습니다. 또, 대규모 촬영 장비의 반입으로 일부 벽면과 골목길이 훼손되는 문제도 보고되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최근에는 촬영 전후로 건물 상태를 기록하고, 원형 복원을 조건으로 촬영 허가를 내주는 제도가 시행되고 있습니다.
관광객의 급증은 또 다른 과제를 만들었습니다. 좁은 골목에 하루 수백 명이 드나들면 벽체 진동과 마모가 빨라지고, 기념품 상점들이 무분별하게 들어서면서 전통 공간의 경관이 변질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일부 구역은 ‘유적 전용 구역’으로 지정되어 상업 활동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지역경제·보존 전략
아이트벤하두의 현재 과제는 명확합니다. 영화와 관광이 가져다주는 경제적 이익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카스르의 원형과 문화를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입니다. 이를 위해 지역 협동조합과 정부, 국제 보존 단체가 협력한 ‘공동 관리 모델’이 도입되었습니다.
첫째, 보존 기금을 마련하는 방식입니다. 촬영팀과 관광객에게 부과되는 입장료·허가료 중 일정 비율을 전통 건축 복원에 사용합니다. 이 기금은 흙과 짚, 전통 목재를 구입하거나, 장인을 고용해 복원 작업을 지속하는 데 쓰입니다. 이를 통해 보존 활동이 단발성에 그치지 않고 지속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둘째, 주민 참여를 강화하는 방안입니다. 보존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젊은 세대가 전통 건축 기술을 배우게 하고, 관광 서비스와 연계해 일자리를 제공합니다. 예를 들어, 관광 가이드가 건축 복원 과정을 직접 시연하며 설명하는 프로그램은 교육과 홍보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사례입니다.
셋째, 관광 흐름을 분산하는 전략입니다. 카스르 외곽의 자연경관, 인근 마을의 수공예 마켓, 아틀라스 산맥 트레킹 코스를 함께 홍보해 한 곳에 인파가 집중되지 않도록 합니다. 이렇게 하면 유적 훼손 위험이 줄고, 인근 지역 경제에도 혜택이 돌아갑니다.
마지막으로, 국제적 네트워크를 활용한 홍보와 보존입니다. 유네스코와 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의 기술 지원, 영화 제작사의 사회공헌 프로그램, 해외 건축학교와의 협력 프로젝트를 통해 최신 보존 기술과 재료를 도입하고, 전통 기술의 가치를 세계에 알리고 있습니다.
아이트벤하두는 모래와 흙, 짚으로 빚은 마을이 세계적인 영화의 무대가 되며 얻은 명성과, 그 과정에서 생긴 보존의 숙제를 동시에 짊어지고 있습니다. 영화 속 장면으로만 알던 사람들에게는 이곳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수백 년간 살아온 사람들의 역사와 기술, 문화가 깃든 공간임을 알려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만약 모로코 여행 계획이 있다면, 아이트벤하두를 영화 세트처럼 소비하는 대신,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보기를 추천합니다. 흙벽에 손을 대어 보면 그 온기가 전해지고, 골목을 걸으면 먼 과거의 발자취가 들려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이곳이 왜 단순한 촬영지가 아니라 살아 있는 문화유산인지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