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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결이 빚은 통영의 예술 지도

by parttime1 2025. 8. 9.

통영 항구의 모습
통영 항구의 모습

 

통영은 바다와 맞닿은 도시지만, 그 바다는 단순한 수평선이 아닙니다. 리아스식 해안이 만들어낸 굴곡진 포구와 섬들은 도시의 생활 방식과 문화, 그리고 예술의 형식을 규정해 왔습니다. 이 글에서는 통영의 지형적 특성이 어떻게 예술의 토양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 구조가 오늘날 통영을 예술도시로 자리 잡게 한 과정을 살펴봅니다.

리아스식 해안이 만든 삶의 무대

통영의 바다를 지도에서 보면, 단순한 해안선이 아닌 실핏줄 같은 곶과 만이 이어져 있습니다. 스페인의 갈리시아 해안과 유사한 이 리아스식 해안은 해안선이 길고 굴곡져 있어 수많은 포구를 품고 있습니다. 이런 지형은 단순히 어업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생활권을 형성하는데 적합했습니다. 통영의 어촌과 항구는 바다를 중심으로 한 사회 구조를 만들었고, 이는 공동체의 협력과 교류를 필연적으로 강화했습니다. 좁은 포구마다 형성된 작은 공동체는 자신들만의 문화와 이야기, 그리고 작업 방식을 유지했고, 이런 다채로운 생활양식이 훗날 예술적 소재와 형식의 원천이 된 것입니다. 특히 통영의 바다는 ‘계절에 따라 표정이 바뀌는’ 바다입니다. 겨울의 잿빛 수평선, 봄의 잔물결, 여름의 빛나는 수면, 가을의 청명한 바람. 이 다양한 모습의  풍경은 작곡가 윤이상, 시인 유치환, 화가 전혁림 등 통영 예술인들의 작품에 깊숙이 배어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해안의 굴곡과 좁은 포구는 외부의 영향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외래문화가 무분별하게 들어오기보다, 바다를 건너오는 이방의 풍경과 소리를 천천히 흡수하며 지역 고유의 색을 지켜온 것입니다. 이런 느린 흡수와 재해석의 과정은 통영 문화가 단순 모방이 아닌 창조적 변형으로 자리 잡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예술의 소재가 된 지형과 공간

리아스식 해안의 또 다른 특징은 ‘닫힌 공간과 열린 공간의 공존’입니다. 곶 너머의 바다는 완전히 다른 표정을 하고 있고, 그 너머에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같은 공간 구조는 통영의 예술가들에게 시각적, 서사적 자극을 끊임없이 제공했습니다. 예를 들어, 전혁림 화백의 그림 속 강렬한 색채와 구조감은 통영의 항구와 집들이 빚어내는 색의 조합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곶 사이로 보이는 섬들의 배열, 수면 위로 흩어지는 빛, 산비탈에 층층이 놓인 집들의 형태는 그 자체가 추상화의 구도와 같았습니다. 음악에서도 지형은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윤이상의 음악은 종종 파도와 물결의 리듬을 닮았다고 평가받습니다. 리아스식 해안의 잔잔한 만과 거친 바깥바다의 대비, 그 경계에서 들리는 바람과 물결의 소리는 그의 작품 속 리듬과 구조로 옮겨졌습니다. 또한 이 지형은 이야기꾼과 예술가들이 ‘경계’라는 주제를 탐구하는 데도 중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육지와 바다, 섬과 육지, 고향과 타향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감정과 사건들은 문학과 연극, 사진의 중요한 모티프로 활용되었습니다. 실제로 통영의 연극제나 사진전에서는 이 ‘경계성’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꾸준히 발표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통영 예술도시의 구조와 미래

통영이 예술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한 관광 개발이 아니라 지형이 만든 문화적 DNA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기 때문입니다. 통영국제음악제,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전혁림미술관, 그리고 작은 골목의 공방과 아트숍까지, 이 모든 문화 자산은 바다와 포구, 그리고 섬들이 빚어낸 생활 구조 위에 놓여 있습니다. 최근 통영은 예술을 통한 도시재생에도 주력하고 있습니다. 오래된 어시장의 일부 공간이 작가들의 작업실과 전시 공간으로 변모했고, 비어있던 항구 건물들이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예술 거점이 되었습니다. 이런 변화는 관광객 유치와 동시에, 지역 예술인들의 창작 기반을 강화했습니다. 또한 리아스식 해안이 주는 ‘다중 시선’은 여전히 통영 예술의 핵심입니다. 한 지점에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포구와 섬, 바다와 산을 끊임없이 오가며 시선을 전환하는 방식은 통영 예술가들의 작업과 기획 방식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통영은 단순히 예술 소비 도시를 넘어, 창작과 연구, 그리고 국제 교류의 거점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를 위해 지역과 외부 예술인의 협업 구조를 강화하고, 리아스식 해안이라는 천연의 무대를 활용한 실험적 공연과 전시를 지속적으로 시도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러한 시도는 통영의 예술이 지역의 테두리를 넘어 세계 무대에서도 주목받게 하는 중요한 발판이 될 것입니다.

 

통영의 예술은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리아스식 해안이 만든 복잡한 포구, 섬, 그리고 바다의 표정이 곧 예술의 형식이 되었고, 사람들의 생활이 예술의 내용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통영이 ‘예술의 도시’로 불리는 이유는, 그 지형적 구조 속에 이미 수백 년간 축적된 감각과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다의 결을 읽는 일은 곧 이 도시의 예술을 이해하는 일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