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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산복도로 책방, 도시를 다시 읽다

by parttime1 2025. 8. 8.

책방의 진열대에 놓인 작은 다육 화분
책방 진열대에 놓인 작은 다육 화분

 

부산 산복도로는 원래 도시의 변두리, 낙후된 주거지로 인식되던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 언덕길을 따라 작은 책방들이 하나둘 들어서며, 이곳은 조용히 문화의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습니다. 책이 도시를 다시 읽게 만들고, 사람과 장소가 새로운 관계를 맺는 이 거리에서 우리는 오래된 도시의 미래를 마주하게 됩니다. 이번 글에서는 산복도로 책방거리의 문화적 가치, 도시재생 사례로서의 의미, 그리고 책방이 어떻게 도시를 바꾸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풀어봅니다.

산복도로라는 공간이 가진 도시적 맥락

부산 산복도로는 도시가 급속히 확장되던 시기에 생겨난 급경사 지대의 주거 지역입니다. 6·25 전쟁 이후 피란민들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들이 밀집해 있으며, 그 당시의 구조가 지금도 대부분 유지되고 있습니다. 지형적 특성상 도시 중심부와 단절된 이 공간은 오랫동안 낙후된 지역, 개발의 사각지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고지대의 마을에는 독특한 풍경이 있었습니다. 미로처럼 얽힌 골목, 계단길, 집과 집 사이로 보이는 바다 풍경, 그리고 산 아래로 펼쳐진 도시의 전경은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장면이었습니다. 특히 해 질 무렵 산복도로에서 바라보는 부산항과 시가지의 풍경은, 마치 도시를 조감하는 창문 같은 느낌을 줍니다.

산복도로는 단순히 낙후된 공간이 아니라, 부산이라는 도시가 겪어온 역사와 삶의 레이어가 중첩된 공간입니다. 그렇기에 이곳을 재생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한 개발이 아닌, 공간이 가진 시간성과 기억을 어떻게 보존하고 확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 해답 중 하나가 바로 '책방'이었습니다.

책방이 도시재생의 플랫폼이 된 이유

책방거리의 시작은 '동주책방'과 같은 소규모 독립서점에서 비롯됐습니다. 한 명의 창작자가 운영하는 이 책방은 처음에는 단지 문학과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조용한 공간이었지만, 곧 지역 주민들과 방문자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장으로 기능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낙원책방’, ‘봄날의 책방’, ‘책방 골목 안으로’ 등이 하나둘 생겨나면서 하나의 책방 거리가 형성되었고, 이는 단순한 상업 공간이 아닌 ‘문화적 재생 플랫폼’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들 서점은 보통 1인 혹은 2~3인 규모로 운영되며, 특정 장르에 집중하거나 직접 만든 독립출판물을 중심으로 큐레이션 됩니다. 이곳에서 판매되는 책은 대형서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베스트셀러가 아니라, 지역 작가의 시집, 사진 에세이, 지역사회 아카이빙 책자 등 한정된 독자층을 위한 콘텐츠입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더욱 진정성 있는 교류가 이루어지며, 책방은 점점 지역 주민과 외부 방문자를 잇는 연결고리가 됩니다.

책방이 특별한 이유는 물건을 파는 공간을 넘어, 이야기가 머무는 장소라는 점입니다. 독서 모임, 글쓰기 강좌, 시 낭독회, 동네산책 프로그램 등은 모두 책방의 부가적인 프로그램이지만, 그 효과는 단순한 체험 이상의 것을 만들어냅니다. 이러한 활동은 단절된 지역 공동체를 다시 연결하고, 사람들이 이 공간에 정주하거나 반복 방문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 됩니다.

책방 거리라는 개념은 도시재생의 방식이 더 이상 철근과 시멘트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콘텐츠가 중심이 되는 문화형 도시재생, 그리고 그 콘텐츠를 가장 효율적으로 담아내는 공간으로서의 책방. 부산 산복도로는 그 가능성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사람과 이야기가 모이는 문화의 언덕

산복도로 책방거리의 진짜 매력은, 책 그 자체보다 ‘사람’입니다. 책방의 주인은 대부분 이 마을로 귀촌한 청년 예술가, 문학 전공자, 또는 삶의 전환점을 맞은 중년 창업자들입니다. 그들은 공간을 단지 생계 수단이 아닌, 자신이 지향하는 삶의 방식으로 디자인합니다. 예를 들어 ‘동주책방’의 경우, 윤동주의 시 세계를 모티프로 한 공간으로, 내부 인테리어부터 판매하는 도서까지 하나의 정체성을 유지합니다. 주인은 가끔 작은 시 낭송회를 열거나, 마을 노인들과 함께 시 쓰기 워크숍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책은 단지 매개체이고, 핵심은 사람과의 연결입니다. 책방마다 자신만의 큐레이션 철학이 있으며, 그 책들을 어떻게 진열할지, 어떤 문장을 입구에 둘지, 방문자에게 어떤 감정을 주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고민이 쌓이면서 책방은 도시의 기억을 담는 그릇이 됩니다. 방문자들도 책만 사는 것이 아니라, 이 거리의 정서에 공감하고 머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산복도로를 단지 풍경 좋은 곳이 아니라, 사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기억하게 됩니다.

또한 이 거리에서는 ‘책방 지도’를 통해 각 책방 간의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매년 ‘산복도로 책방 축제’와 같은 문화행사가 열립니다. 이는 각각의 개별 공간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그 공동체가 다시 지역 전체의 문화적 품격을 높이는 구조를 만들어냅니다.

 

산복도로 책방거리는 부산의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공간입니다.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골목 위에, 책이라는 현재의 이야기가 놓이고,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도시의 미래가 열리고 있습니다. 단순한 관광 명소를 넘어, 이곳은 삶과 문화, 공동체가 다시 만나는 공간입니다. 부산을 다시 보고 싶다면, 가장 높은 언덕에서 책 한 권을 펴보는 것부터 시작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