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에는 수많은 여행자가 찾는 명소가 많습니다. 해수욕장, 중앙시장, 설악산, 영금정. 하지만 이 중 어느 것도 속초의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진 않습니다. 그 도시에 오래 머문다는 건 해변의 파도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골목과 사람과 벽 사이에 감춰진 것들을 관찰하는 일입니다. 이번 여행은 그런 마음에서 시작됐습니다. 속초 청호동, 그중에서도 ‘철책선이 마을을 가로지르는 국내 유일의 생활 공간’, 철책길을 따라 걷는 여행입니다. 이곳은 관광지로 포장되지 않았고 간판도, 포토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더 선명한 분단의 감각과 삶의 결이 살아 있는 장소입니다. 이 글은 속초라는 도시에 숨겨진 한 줄의 경계선 위를 걷고, 그 주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흔적과 도시의 시간을 기록한 여정입니다.
철책이 가로지르는 마을 – 청호동의 구조
속초 청호동은 속초항과 동명항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 바다를 옆에 끼고 오래전부터 어업과 실향민 공동체를 기반으로 형성되었습니다.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의 형태가 만들어졌고, 이후 철책은 단순 군사 방어선을 넘어 마을의 경계이자 일상이 되었습니다. 청호동 철책은 높이 약 2.5m 정도의 철망 울타리로, 마을 중간을 일직선으로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이 철책은 군사용 경계선이라기보다는 상징적 의미가 강한 구조물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철책 안쪽은 군 작전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철조망 사이로 군부대의 감시 카메라와 안내 문구가 눈에 띕니다. 철책 옆 골목은 마을 주민들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바닷가로 통하는 길, 공터, 낡은 벽돌집, 오래된 경운기, 그리고 묵은 소금창고가 보입니다. 철책은 무언가를 막기 위해 세운 구조물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에서는 삶의 흐름과 기억을 담는 ‘프레임’으로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실향민의 터전, 그리고 철책 아래 일상의 흔적
청호동 철책길의 독특함은 그것이 단절을 의미하면서도 동시에 연결의 공간이라는 데 있습니다. 철조망 아래에는 주민들이 걸어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이 나 있고,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길옆으로 빨래를 널고, 고추를 말리는 평범한 생활 풍경이 펼쳐집니다.
골목 벽에는 '실향 1세대 기념비'나 '귀향을 기다리는 사람들' 같은 소박한 문구들이 붙어 있고, 몇몇 집 앞에는 북한 지명을 적은 표식이 있습니다. 이 마을의 주민 중 상당수는 지금도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지도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느 집에서는 장독대가 철책 바로 옆에 놓여 있고, 다른 집에서는 철조망을 병풍처럼 삼아 텃밭을 꾸며놓았습니다. 이런 모습은 매우 이질적이면서 가슴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분단의 상징인 철책이 이 마을에선 삶의 배경이자 틀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는 증거입니다. 마을 입구에는 청호초등학교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철책 옆 골목을 지나 등하교를 합니다. 그들에게는 철조망이 군사시설이 아니라, 그냥 ‘어릴 적부터 항상 거기 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분단이라는 거대한 국가의 구조물이, 이 마을에선 평범한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풍경입니다.
경계 위를 걷는 감각 – 여행자로서의 통과 의례
청호동 철책길을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거리를 이동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시간과 구조 사이를 조심스럽게 통과하는 경험에 가깝습니다. 첫째, 시각의 경험. 철책이라는 물리적 장벽은 공간을 반으로 나누지만, 동시에 바라보는 시선을 고정시킵니다. 철망 너머의 집, 그 안의 사람들, 멀리 보이는 바다가 모두 하나의 풍경 안에 들어옵니다. 철책은 카메라 뷰파인더처럼, 마을을 틀 안에 가둔 채 보여주는 장치가 됩니다. 둘째, 청각. 바닷바람 사이로 들리는 파도 소리, 철망에 부딪히는 깃발 소리, 간간히 오가는 주민의 말소리. 이 모든 소리는 관광지 특유의 인위적 음악 대신, 동네 자체가 만들어내는 사운드트랙입니다. 셋째, 감정. 철책길을 걷다 보면 묘한 정적과 긴장이 함께 올 때가 있습니다. 이곳은 국가와 지역, 전쟁과 생활이 교차하는 장소이며 걷는 동안 반복해서 떠오르는 건 '이 공간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속초 청호동 철책길은 한국의 분단 현실이 얼마나 일상에 가까이 와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소입니다다. 동시에 그것은 단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살아 있는 마을이기도 합니다. 이 거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철책이라는 구조물이 위압적이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너무 오래 그 자리에 있어서, 삶의 한 부분처럼 흡수된 존재였습니다. 주민들은 철책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따라 걷고, 옆에서 말리고, 넘보기도 합니다. 여행자는 이 길을 통해 한 도시의 감춰진 역사를 읽고, 동시에 그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강인함을 목격하게 됩니다. 속초의 바다는 화려하지 않아도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그 바다를 가로지르는 철책 아래, 사람과 기억이 계속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여정은 충분히 깊이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