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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과 장인이 숨쉬는 프랑스 상필리에

by parttime1 2025. 8. 14.

상필리에 수도원
상필리에 수도원

 

프랑스 옥시타니 지역 오드(Aude) 주의 들판 한가운데, 상필리에(Saint-Papoul)는 지도를 비집고 들어온 작은 이름이지만 마을 전체가 조용한 박물관처럼 느껴집니다. 수도원이 씨앗이 되어 자란 마을은 장인들의 손끝에서 오늘까지 이어졌고, 성당의 종소리와 공방의 망치 소리가 섞인 일상이 여행자에게 스며듭니다. 빠르게 훑어보는 관광과는 어울리지 않는 곳, 대신 천천히 걸을수록 깊어지는 이야기들이 골목마다 겹겹이 놓여 있습니다. 이 글은 수도원이 어떻게 마을을 만들었는지, 장인 문화가 어떻게 현재로 이어졌는지, 그리고 상필리에가 선택한 지속가능한 관광의 방식이 무엇인지 차분히 살펴봅니다.

수도원이 만든 마을의 탄생과 변화

상필리에는 8~9세기경 세워진 베네딕트회 수도원에서 출발했습니다. 오늘날 ‘상필리에 수도원(Abbaye de Saint-Papoul)’로 남아 있는 이 공간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회랑과 석조 장식이 놀랄 만큼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수도원은 단지 기도만 올리던 곳이 아니었습니다. 수도사들은 주변에 포도밭과 허브 정원을 일구고, 약초와 양봉, 포도주 양조, 필사본 제작 같은 실용적인 일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수도원 경제가 안정되자 주변에는 장터가 생겼고, 농부와 직인, 상인이 모여 살기 시작했습니다. 마을의 중심축은 성당—장터—공방—물길로 이어졌고, 이 축이 도시 구조의 뼈대가 됩니다. 지금도 수도원 앞 광장에 서면, 그 축의 방향감각이 이상할 만큼 선명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중세 후기로 갈수록 수도원은 문화와 교육의 거점이 됩니다. 회랑을 따라 펼쳐진 조각들—포도넝쿨, 샴페르 문양, 성서 이야기의 부조—은 석공과 목수, 유리 장인의 협업이 만든 종합예술입니다. 성당 창호 뒤편으로 비치는 스테인드글라스는 당시 장인들의 유리 배합과 색의 감각을 지금에도 전합니다. 그러나 역사가 늘 평탄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16세기 종교전쟁은 수도원에도 상처를 남겼고, 18세기 프랑스 혁명은 수도원의 재산을 국유화해 마을 공동의 자산으로 전환시켰습니다. 건물은 일부 훼손되었지만, 주민들은 재료를 모아 지붕을 다시 얹고, 부서진 회랑을 복원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도원은 종교 공간을 넘어 시민적 기억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수도원에서는 산책하듯 동선을 잡아 보십시오. 수도원 남쪽 출입문을 지나면 작은 채플과 필사실이 연결됩니다. 필사실에는 지역 아카이브에서 복제한 필사본과 도구가 전시되어 있고, 잉크색과 거위깃 펜의 질감이 눈앞에서 살아납니다. 채플의 벽면에는 세월이 벗겨낸 석회 아래로 얇게 남은 프레스코 흔적이 보이고, 빛은 오후가 되어야 각을 잡아 조상들의 색을 끌어올립니다. 이 섬세한 시간표에 맞춰 마을도 움직입니다. 오전엔 장터가 열리고, 정오엔 성당 종소리가 점심을 알리며, 해 질 녘이면 공방 불빛이 하나둘 켜집니다. 수도원 중심의 생활리듬이 지금까지도 상필리에의 일상을 부드럽게 조율하는 셈입니다.

도시 형성의 더 깊은 뿌리를 들여다보면 수도원의 ‘기술 시스템’이 눈에 들어옵니다. 경작지를 구획하고 물길을 정리해 홍수를 피하는 작은 둑과 배수로, 채광을 고려해 남향으로 놓인 마당, 겨울 북서풍을 피해 골목을 틀어 만든 배치. 이것은 신앙의 산물이자 경험의 산물입니다. 상필리에의 가옥들이 대체로 낮고 두꺼운 석벽을 갖는 이유, 지붕 경사가 완만한 이유, 창의 크기가 작고 깊게 파인 이유는 모두 같은 장부에서 나온 설계 원칙들입니다. 수도원은 건축 지식이 축적되는 창고였고, 그 지식은 마을 전체로 흘러나와 ‘살만한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상필리에의 풍경은 ‘보기에 좋은’ 이전에 ‘살기에 무리가 없는’ 편안함을 먼저 전합니다.

장인 문화의 뿌리와 현대적 재해석

상필리에의 골목을 걷다 보면 소리로 먼저 공방을 만납니다. 나무를 대패로 밀어내는 낮은 사각, 물레 위에서 점토가 오르는 둔탁한 회전, 풀무의 바람이 쇠뿔을 달구는 숨소리. 장인의 작업은 눈보다 귀로 먼저 다가옵니다. 이 마을 장인 문화의 뿌리는 수도원 지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제대와 의자, 문짝과 경첩, 촛대와 성물, 성서 표지와 필사 도구까지—수도원이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물건이 마을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공방은 수도원 외벽을 경계로 빽빽하게 붙어 있었고, 그중 일부는 지금도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합니다.

20세기를 지나며 상필리에는 이 전통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전후 도시화가 본격화되면서 많은 프랑스 소도시가 공방을 잃었지만, 이곳은 ‘기술을 관광으로 번역’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체험형 워크숍이 공방의 일과로 자리 잡습니다. 도예 공방에서는 반나절 동안 머그컵 하나를 빚고, 초벌-유약-재벌의 과정을 설명해 줍니다. 가죽 공방에서는 식물성 무두질(베지터블 태닝) 가죽을 손바느질로 꿰며, 실의 꼬임 방향과 스티치 간격을 직접 맞춰 봅니다. 유리 공예 스튜디오에서는 소규모로 램프워킹을 체험하는데, 700도 가까운 불꽃 앞에서 녹는 유리의 성질을 눈으로 배우는 경험은 드물고 짜릿합니다.

이들 공방이 공통으로 고집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보여주기 위한 과장’보다 ‘실제로 쓰이는 물건’을 만든다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상필리에상필리에 기념품은 유행에 편승한 장식보다 생활에 스며드는 물건입니다. 수분을 잘 먹고 오래 버티는 가죽 카드지갑, 손에 닿을수록 윤기가 도는 올리브 우드 스푼, 차의 온도를 오래 붙잡는 두꺼운 도자 머그. 여행에서 돌아와도 매일 손이 가는 물건들이죠. 덕분에 상필리에의 상업은 ‘고객 회전율’보다 ‘관계 지속성’에 초점을 맞춥니다. 작가명과 수선 연락처를 함께 적어 보내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장인 생태계를 지탱하는 제도적 장치도 세심합니다. 마을은 공방 임대료를 장기 고정하거나 매출에 연동해 완만하게 책정하고, 시청—장인—관광사무소가 함께 운영하는 ‘공방 지도’를 계절마다 업데이트합니다. 여름엔 야외 시연 무대를 만들어 다이 카빙, 손물레 짜기, 유리 비드 제작을 순환 시연하고, 겨울엔 성당 앞 광장에 난로를 놓아 야외 강좌가 끊기지 않도록 배려합니다. 이 모든 운영은 박람회식 이벤트가 아니라, ‘기술이 마을에 머무는 방법’을 찾아낸 생활의 기술입니다.

상필리에의 음식 문화도 장인 생태계의 일부입니다. 바게트와 시골빵을 굽는 화덕은 매일 새벽 불을 얻고, 수도원 레시피에서 내려온 허브 혼합이 치즈와 파테에 깊이를 줍니다. 와인 바에서는 인근 카바르데(Cabardès)와 말페르(Malepère) AOC의 와인을 글라스로 제공합니다. 잔에 코를 대면 건초와 검은 과실, 허브의 향이 순서대로 올라옵니다. 마을에서 권하는 방식은 단순합니다. ‘하루 두 끼만 밖에서 먹고, 나머진 장터에서 사서 공방 앞 벤치에서 나눠 먹어 보라’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그저 먹는 자리가 아니라 일과 풍경 속에 식사를 놓아두는 법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됩니다.

지속가능 관광과 마을의 미래

상필리에가 택한 관광의 좌표는 분명합니다. ‘더 오래 머무르는 적당한 사람’을 위한 마을. 그래서 대형버스가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늘리는 대신, 외곽 환승 주차장을 정비해 도보 접근을 기본으로 잡았습니다. 중심부는 서행 구역이고, 성당과 수도원 일대는 차량 진입이 제한됩니다. 이런 교통 정책은 풍경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공방의 창을 열어두기 위한 배려이기도 합니다. 엔진 소음이 적고 매연이 줄면, 작업의 호흡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건축 보존 정책의 핵심은 ‘보이지 않는 개선, 보이는 원형 유지’입니다. 내벽 단열, 창틀 내부 보강, 배수로 정비는 적극 지원하되, 외벽의 석조 축조, 목재 새시의 분할 비율, 기와의 물매는 엄격히 심사합니다. 이 과정에서 전문가만 발언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주민 대표와 장인이 동석해 생활의 관점을 대변합니다. 예컨대 겨울 결로 문제는 단순히 단열재를 두껍게 넣는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흙벽의 호흡과 통기, 난방 방식, 습기 배출 동선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이런 동의 과정이 느려 보여도, 결과적으로 수선의 수명이 길어지고 비용도 줄어듭니다. ‘제대로 한 번’ 고치면 20년은 걱정이 없습니다.

경제 구조는 소규모·분산이 원칙입니다. 숙박은 게스트하우스, 농가민박, 소형 부티크 호텔이 주력이고, 상업 임차는 체인보다 개인 운영자를 우선합니다. 관광 수익의 일부는 ‘상필리에 보존 기금’으로 자동 적립되어, 지붕 슬레이트 보수, 회랑 보강, 프레스코 보존 처리, 공방 장비 공동 구매에 투입됩니다. 특히 프레스코와 스테인드글라스 보존은 장기 계획으로 운영해, 계절별 점검—미세 균열 충전—색 안정화—재도장—기록 공유의 루틴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체계 덕분에 보수는 사건이 아닌 일상이 됩니다.

상필리에의 교육 프로그램은 지속가능 관광의 또 다른 축입니다. 학교와 연계한 ‘살아 있는 역사 수업’은 아이들이 성당 종루에 올라 종을 치고, 수도원 정원에서 허브를 따 차를 달이며, 공방에서 대못을 하나 만들어 보는 커리큘럼으로 구성됩니다. 여행자에게는 짧은 강좌가 마련되어, ‘로마네스크 읽기 1시간’ 같은 초심자 강의가 열립니다. 성당 정면의 아치와 주두, 회랑 아케이드의 리듬을 읽어 나가다 보면, 풍경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문장처럼 의도를 품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학습형 프로그램은 머무는 시간을 자연히 늘리고, 재방문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만듭니다.

물론 상필리에에도 고민은 있습니다. 여름 성수기 단기 임대 증가로 주거 비용이 오르는 문제, 인기 공방 중심의 상업 집중, 기후변화로 인한 여름 폭염과 겨울 강우 패턴 변화가 석조와 프레스코에 주는 부담 등이 그것입니다. 마을은 이를 ‘총량 관리’와 ‘품질 관리’로 대응합니다. 단기 임대 허가를 구역별로 상한을 두고, 일정 비율을 장기 거주에 의무적으로 배정합니다. 인기 공방에는 수습생을 연결해 작업량을 분산하고, 공동 판매관을 운영해 작은 공방에도 안정적인 판매 창구를 제공합니다. 기후 스트레스에는 배수로 확대, 석재 줄눈 재시공, 실내 온습도 로깅과 환기 스케줄 표준화 같은 현실적인 처방을 택했습니다. 대단한 구호보다 매일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하는 태도, 그것이 상필리에의 방식입니다.

여행자가 할 수 있는 일도 분명합니다. 오래 머물 것, 필요한 만큼만 살 것, 쓰는 사람의 이름을 기억할 것. 공방에서 산 물건을 쓰다가 닳으면 수선을 맡기고, 가능한 한 현지에서 먹고 마시며, 사진보다 이야기를 가져갈 것. 마을이 기대하는 ‘좋은 손님’의 조건은 생각보다 소박합니다. 그렇게 관계를 쌓아두면, 상필리에에서의 하루는 단 한 번의 체험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다음에 왔을 때 이어서 완성할 작은 그릇 하나, 지난번에 주문해 두었던 가죽 커버 하나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상필리에는 관광지라기보다 삶의 교본에 가깝습니다. 수도원이 남긴 배치의 지혜, 장인이 지켜 온 손의 기술, 마을이 합의한 운영의 원칙이 겹겹이 쌓여 풍경을 만듭니다. 빠르게 소비되는 볼거리와 달리, 이 풍경은 느리게 배우고 오래 쓰는 법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상필리에에서의 여행은 돌아와서 더 길게 이어집니다. 매일 손에 닿는 물건 속에, 매주 꺼내 읽는 메모 속에, 한 해에 한 번 다시 건너가고 싶다는 마음 속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