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쑤이창 논길에서 고산의 삶을 걷다

by parttime1 2025. 7. 17.

고산의 계단식 논
고산의 계단식 논

 

 

중국 저장성 남서부의 쑤이창(遂昌)은 대도시와 멀리 떨어진 해발 800m 고산 지대에 자리한 조용한 전통 농촌 마을입니다. 잘 알려진 관광지와 달리 이곳은 오래된 계단식 논과 손 벼 베기, 이웃 공동체의 삶이 지금도 실시간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기계가 없는 풍경, 흙 묻은 손으로 쌀을 만드는 사람들. 쑤이창은 도시화 이전의 리듬으로 살아가는 마을이자, ‘사람의 속도’로 여행할 수 있는 아주 귀한 공간입니다.

안갯속 계단식 논, 고산의 아침을 열다

쑤이창의 하루는 아주 이른 새벽, 산 능선을 타고 내려오는 안갯속에서 시작됩니다. 아침 햇살은 아직 산등성이를 넘지 못했고, 계단식 논은 고요하게 수면을 유지한 채 기다리는 듯한 분위기를 품고 있습니다. 논둑 옆으로는 이슬에 젖은 풀이 발끝을 스치고, 멀리서 소 젖 짜는 소리, 대나무 바구니를 끌고 가는 마을 사람의 걸음소리가 울립니다. 이 논들은 대부분 60~70년 이상 된 전통 방식 그대로 이어져 온 것으로, 평평한 밭이 아닌 산의 경사면을 활용한 구조이며 대부분 해발 800m 이상의 고산에 분포해 있어, 기계화 농업이 불가능합니다. 흙을 고르는 일, 물을 대는 일, 모종을 심고 수확하는 일까지 모두 사람의 손으로 이뤄집니다. 이 모든 노동은 관광객을 위한 퍼포먼스가 아니가 실제 생활이라는 점에서 깊은 울림을 줍니다.

손 벼베기와 공동 방앗간 그리고 장터

가을,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시기. 쑤이창은 1년 중 가장 바쁜 계절을 맞이합니다. 논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손에는 낫, 짚단을 묶을 끈, 그리고 가볍게 등에 멘 대나무 바구니가 들려 있습니다. 쌀 수확은 가족 단위가 아닌, 마을 단위로 움직입니다. 예를 들어 한 집이 먼저 벼를 베기 시작하면, 이웃들은 말없이 도와주고 다음 날은 서로 교대하는 방식입니다. ‘도와주기 위한 도움’이라는 개념이 아닌, 이곳의 전통적 농업 리듬입니다. 수확한 벼는 마을 공동 방앗간으로 옮겨집니다. 방앗간은 작은 수로를 이용해 돌아가는 수차로 작동하며, 그 소리는 의외로 차분하고 낮게 울립니다. 이곳에선 전기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물과 기계의 무게를 이용한 방식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습니다. 볕 좋은 날이면 마을 골목 곳곳에 벼단이 펼쳐지고, 아이들이 그 위를 뛰어다니며 놀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작업이자 놀이이며 일상이자 풍경입니다.

매주 주말엔 마을 장터가 열리는데, 갓 캐온 산나물, 손으로 만든 대나무 숟가락, 직접 길쌈한 천, 방금 지은 떡, 직접 담근 황토 된장등 마을 주민들이 직접 만든 물품들을 판매합니다. 이 장터에서는 흥정이 없습니다. 서로를 아는 사람들끼리의 신뢰, 혹은 굳이 설명할 필요 없는 공감이 장터의 룰을 대신합니다. 손님은 물건을 사고, 상인은 ‘더 맛있게 먹는 법’을 알려주고, 마을 아이들은 옆 골목에서 버려진 쌀포대로 비석 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웃과 공동체, 사라지지 않은 관계

쑤이창을 천천히 걷다 보면 '집'보다 '사람'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어느 집은 부엌문을 열어둔 채로 된장을 끓이고 있고, 그 옆집은 모종을 심다 잠시 들러 차 한 잔을 건넵니다. 누가 누구네 집인지 구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마을에선 문이 닫힌 집보다 열린 마음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재밌는 건, 이곳 주민들이 스스로를 ‘논의 일부’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논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 "논이 배고프면 나도 먹을 게 없다"는 말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삶을 구성하는 중심 철학입니다. 이러한 공동체적 감각은 오늘날 도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귀한 감정입니다. 그것은 효율이나 기능이 아니라, ‘서로에게 기대어 사는 방식’입니다.

쑤이창은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없는 마을일 수 있습니다. 고궁도, 쇼핑몰도, SNS 인증샷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곳에는 수로에서 돌아가는 방앗간의 둔탁한 리듬, 말없이 도와주는 이웃의 손, 논물 속에 비친 하늘, 그리고 저녁이면 집 앞 평상에 앉아 차를 마시는 삶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곧 여행이고, 배움이며, 귀한 감각입니다. 쑤이창에서 논을 걷는다는 것은 ‘자연을 본다’는 의미 이상으로, 삶을 어떻게 살고 싶은가에 대한 작고 확실한 질문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