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을지로3가역 11번 출구를 나서면, 서울의 또 다른 시간대가 펼쳐진다. 바로 옆 종로와 명동이 번쩍이는 쇼윈도로 치장된 도시라면, 이곳은 여전히 철과 기름, 잉크의 냄새로 가득한 서울의 내부다. 좁은 골목 안에는 사람 키보다 높은 철판이 빼곡히 세워져 있고, 그 사이로 바람이 불 때마다 금속의 마찰음이 은은하게 울린다. 오래된 건물의 벽면에는 전화번호가 손으로 써진 간판이 붙어 있다. 하나같이 오래된 글씨체지만, 사람의 손맛이 남아 있다. 을지로는 서울이 급속도로 변화하는 동안에도 ‘손으로 움직이는 도시’로 남은 몇 안 되는 구역이다. 오늘 이 길을 걸으며 듣게 되는 기계의 진동, 인쇄소의 리듬, 낡은 철제 문이 여닫히는 소리들은 서울의 산업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철과 잉크의 도시, 손의 기억이 남은 거리
을지로3가역 11번 출구에서 세운상가 쪽으로 걷기 시작하면, 좁은 골목마다 금속과 기름 냄새가 뒤섞인다. 한쪽에서는 절단기가 철판을 자르고, 다른 한쪽에서는 인쇄공이 낡은 인쇄기를 돌리며 종이를 쌓고 있다. 1960~1980년대, 서울이 산업화의 속도를 높이던 시절 이 골목들은 그 심장이었다. 당시에는 ‘을지로만 가면 뭐든 고칠 수 있다’는 말이 있었다. 인쇄소, 철공소, 표구점, 조명 가게, 타일 상점까지, 세상 모든 수공업이 이 거리 안에서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도 그 흔적이 선명하다. 길을 걷다 보면 철제문 뒤에서 스파크가 튀고, 누군가 망치로 철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단순한 작업음이 아니라 ‘도시의 리듬’이다. 을지로의 장인들은 여전히 손으로 모든 걸 측정하고 자른다. 디지털 장비보다 손끝의 감각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서울의 다른 곳에서는 사라진 ‘손의 온도’가 느껴진다. 사진 포인트는 세운상가 옥상전망대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오래된 공장 지붕 사이로 햇빛이 스며드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낮에는 철판의 은빛이 반사되어 공업도시의 기하학을 보여주고, 저녁이 되면 노을빛이 철재 지붕을 붉게 물들인다. 이 풍경은 을지로의 시간을 압축한 장면이다.
산업의 기억 위에 새로 들어선 감각
을지로의 현재는 과거와 단절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된 구조물 위에 새로운 감각이 층층이 쌓여 있다. 세운상가 일대의 ‘다시세운 프로젝트’ 이후, 이 골목에는 젊은 창작자와 장인들이 공존하는 특이한 생태계가 형성되었다. 낮에는 인쇄소가 종이를 인쇄하고, 밤에는 그 옆의 소규모 카페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서로 다른 시대의 리듬이 겹쳐 들리는 곳이다. 추천 동선은 을지로3가역 12번 출구에서 시작해 충무로 방면으로 이어지는 **세운상가~을지로4가 조명거리~을지로5길 골목길 루트**다. 약 1시간 30분 정도의 코스로,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서울의 산업 유산과 도시의 현재가 교차한다. 낮에는 철공소의 창문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고, 밤에는 네온사인과 조명 가게의 불빛이 골목 전체를 물들인다. 특히 을지로4가 조명거리 입구에 들어서면, 가게마다 다른 색온도의 빛이 반짝인다. 흰빛, 주황빛, 파란빛이 서로 섞여 도시의 빛의 파노라마를 만든다. 젊은 세대의 사진가와 디자이너들이 이곳을 ‘서울의 빛 연구실’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커피 한 잔이 필요하다면 철공소 사이에 숨어 있는 작은 카페 ‘을지다방’이나 ‘공업사 커피’가 좋다. 원래 철공소였던 공간을 리모델링한 곳으로, 기계 부품을 장식으로 활용하고 있어 을지로 특유의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음료를 마시며 창밖으로 장인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 도시의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을지로를 걷는다는 것, 서울의 뿌리를 마주하는 일
을지로는 단순한 골목이 아니다.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가장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현장이다. 이곳에는 화려한 건물도, 완벽하게 꾸민 거리도 없다. 대신 땀과 손의 흔적이 남은 벽, 오래된 시계소리, 인쇄소의 먼지가 있다. 그것들이 모여 도시의 원형을 이룬다. 최근 몇 년 사이, 을지로는 젊은 세대의 발걸음이 많아졌다. 하지만 이곳을 단순히 ‘힙한 거리’로 보는 건 오해다. 을지로의 진짜 매력은 낡은 시간의 깊이, 그리고 그 안에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인쇄소 사장은 매일 아침 같은 시각에 기계를 켜고, 철공소의 장인은 30년 된 손도끼를 여전히 쓴다. 이 반복의 시간 속에서 서울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도보 여행자에게 추천하는 마무리 코스는 ‘을지면옥’이다. 을지로3가역 1번 출구 근처, 골목 안쪽에 위치한 냉면집이다. 점심시간을 지나 저녁 무렵 들르면, 하루의 피로가 한 그릇의 육수 속으로 녹아내린다. 식사를 마친 뒤, 세운상가 옥상으로 다시 올라가 보자. 해가 지면 을지로의 네온과 공장 불빛이 한데 섞여 묘한 정서를 만든다. 을지로는 사라지는 산업의 도시가 아니라, 여전히 ‘움직이는 도시’다. 이곳에서 들리는 소리는 서울의 심장이 뛰는 소리다. 오래된 기계음 속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생계를 이어가고, 그 일상의 열기가 이 도시에 온기를 남긴다. 을지로를 걷는다는 건, 잊히지 않는 노동의 기억을 발로 짚어가는 일이다. 서울의 본질은 이 골목 안의 땀과 리듬 속에 숨어 있다.
도보 정보
출발: 을지로3가역 11번 또는 12번 출구
루트: 세운상가 – 을지로4가 조명거리 – 을지로5길 골목 – 충무로 방면
도보시간: 약 1시간 30분
추천 방문 시간: 오후 3시~저녁 8시
사진 포인트: 세운상가 옥상 전망대, 조명거리 입구, 철공소 간판 골목, 을지면옥 간판 거리
추천 체험: 활판 인쇄 체험(세운상가 일대), 금속공예 클래스, 을지다방 커피 한 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