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롬블론 주의 시부얀 섬(Sibuyan Island)은 ‘필리핀의 갈라파고스’로 불립니다. 외부 개발이 거의 이뤄지지 않은 이 섬은 놀라울 정도로 순수한 자연환경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대형 리조트나 고급 호텔 없이도 이곳이 꾸준히 자연 탐험가들과 생태학자들의 관심을 받는 이유는 바로 그 ‘원형 그대로의 자연’에 있습니다. 이 섬은 생물 다양성과 생태계 보존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고, 원주민과 환경단체의 노력으로 여전히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마운트 감비, 청정 강, 소규모 공동체의 생태 중심 삶은 시부얀을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하나의 배움의 장소로 만들어 줍니다.
마운트 감비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숲
시부얀 섬의 중심에는 필리핀에서도 가장 험준한 산 중 하나로 알려진 마운트 감비(Mt. Guiting-Guiting)이 있습니다. 이 산은 해발 2,058m로, 초보 등반객에게는 도전의 대상이 되지만 자연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생명의 보고로 불립니다. 이 산 일대는 필리핀에서 가장 높은 생물 다양성 밀도를 자랑하며, 약 1,500종 이상의 식물이 자생하고 그중 절반이 고유종입니다. 산에는 단 한 번도 벌목된 적 없는 ‘순수림’이 존재하며, 이 숲은 자생 식물과 착생 난, 희귀 조류, 고산 곤충 등 다양한 생물의 서식지입니다. 감비 산 트레일은 허가제로 운영되며, 지정된 지역 가이드와 동행해야만 입산할 수 있습니다. 산의 기후는 하루에도 사계절처럼 변화무쌍하며, 정상 부근에서는 강풍과 짙은 안개가 시시각각 모습을 바꿉니다. 트레킹 도중 만나는 바위 능선과 열대 우림은 인간이 개입하지 않은 채 수천 년을 이어온 지질 생태계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학술 조사 외에 일반인들의 등산은 제한되어 있어 자연 훼손이 적고, 각 등산객은 ‘쓰레기 무배출’ 원칙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마운트 감비는 단순한 명소가 아니라, 원시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품게 하는 장소입니다.
섬을 흐르는 강과 폭포, 물의 리듬과 공동체
시부얀 섬에는 마운트 감비에서 시작된 40개 이상의 물줄기가 섬 전체를 가로지릅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Cantingas River는 필리핀에서 가장 깨끗한 강 중 하나로 손꼽히며, 지역 공동체의 생활 중심축이자 탐방객들에게는 천연 수영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맑은 물과 원시림의 그늘 아래에서 흐르는 이 강은, 돌로 쌓은 대나무 다리와 공동 세척장이 이어지는 소박한 풍경을 만들어 냅니다. 지역 주민들은 아침마다 강가에서 설거지나 세탁을 하며 소통하고, 아이들은 학교 수업을 마친 후 이 강에서 수영하며 놀며 자랍니다. 강 주변에는 공공 식수대, 대나무 샤워장, 작은 전통 쉼터가 있으며, 이 모두는 마을 공동체가 자체적으로 만든 것들입니다. Cantingas 외에도 Busay Falls, Dagubdob Falls, Cawa-Cawa Falls 등 여러 폭포가 있으며, 이곳에 닿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길을 내어선 안되고 자연의 인도에 따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합니다. 대부분이 인위적 구조 없이 보존되어 있어 태초의 모습에 가까운 작은 생물 군락이 서식하고, 각 폭포의 소리는 숲의 고요함을 깨지 않는 정도로 조용하게 울립니다. 물의 흐름은 섬사람들의 삶을 정직하게 지탱하고 있으며, 수력발전을 위한 소형 터빈도 설치돼 있어 에너지 자립에도 기여하고 있습니다.
시부얀 사람들, 자연과 공존하는 삶의 방식
시부얀 섬의 가장 큰 자산은 사람들입니다. 이곳 주민들은 외부 자본에 의존하지 않고, 공동체 중심의 자급적 삶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섬에는 대형 슈퍼마켓이나 체인 식당이 없고, 대부분의 식재료는 자체 농업과 어업으로 확보합니다. 주요 작물은 코코넛, 쌀, 카사바이며, 바다에서는 계절별 어종에 따라 친환경 방식으로 조업을 합니다. 주민들은 매주 열리는 마을 회의를 통해 공동체 사안, 농지 사용, 수자원 배분, 쓰레기 처리까지 민주적으로 결정하며, 외부 개발 제안에 대해서도 투표로 입장을 정합니다. 실제로 2000년대 초 제안된 금광 개발 프로젝트는 주민 투표로 거부되었고, 이후 ‘시부얀=개발 없는 섬’으로 언론에 소개된 바 있습니다. 학교 교육에서도 환경 보호가 주요 과목으로 포함되어 있으며, 아이들은 식물 이름, 수질 관리법, 가축 돌보는 법 등을 일상처럼 배웁니다. 특히 ‘한 명이 쓰는 나무는 세 명이 보게 하라’는 속담처럼, 공동체 의식과 절제된 자원 소비가 깊이 뿌리내려 있습니다. 시부얀의 삶은 자연을 소유하지 않고 ‘함께 사는 존재’로 존중하는 방식이며, 그 태도는 방문자에게도 진하게 전해집니다. 단순한 휴식이 아닌 삶의 철학을 배우는 경험, 그것이 시부얀 여행의 진짜 본질입니다.
시부얀 섬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또 하나의 ‘삶의 방식’입니다. 사람이 자연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며 속도를 늦추고 경계를 흐리며 조화를 이루는 삶의 방식. 디지털과 소비로부터 한 걸음 떨어진 이 섬은, 우리가 잊고 있던 인간다운 속도를 회복하게 합니다. 시부얀은 오늘날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깊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자연과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