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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풍바루에서 하루를 살아보면

by parttime1 2025. 7. 20.

고층 빌딩 사이에 위치한 캄풍바루
고층 빌딩 사이에 위치한 캄풍바루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 중심에는 전통 목조 가옥과 느린 삶이 공존하는 ‘캄풍바루(Kampung Baru)’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초고층 빌딩에 둘러싸인 채, 100년 넘게 원주민 공동체가 살아가는 이 마을은 ‘도시의 심장부에 숨겨진 과거’라 불립니다. 이 글에서는 외부인의 시선으로 이곳에서 하루를 살아본다면 어떤 풍경, 사람, 감각을 만나게 될지를 세 가지 시선으로 풀어보겠습니다.

아침, 목조가옥에서 들리는 삶의 소리

캄풍바루의 하루는 도시보다 훨씬 느리게 시작됩니다. 알람 소리 대신 닭 울음소리와 나무마루를 밟는 소리가 들리는 이 마을에서는, 주민들이 대문 없는 마당을 오가며 자연스레 인사를 나눕니다. 집들은 대부분 1920~1950년대 지어진 전통 말레이식 목조 가옥으로, 높은 기단 위에 세워져 습기와 해충을 막고 바람이 자연스럽게 통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창살 틈 사이로 아침 햇살이 스며들고, 바나나 잎과 망고나무 그늘 아래엔 고양이들이 느릿하게 움직입니다. 마을 입구에는 손수 만든 나시르막(코코넛밥과 멸치, 땅콩, 칠리소스) 노점이 서고, 손님과 주인은 이름을 부르며 반가워합니다. 바주 쿠룽이라는 전통 복장을 입은 학생들이 학교에 가기 전, 어머니와 함께 시장에 들러 군것질거리를 사는 모습은 흔한 아침 풍경입니다. 이곳에선 스마트폰보다 말과 손짓이 먼저입니다. 모스크에 울리는 아잔(기도 호출 소리)은 일상의 리듬이 되고, 골목마다 흘러나오는 라디오 음악은 옛 시절을 그리게 만듭니다. 도시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는 이 마을의 아침은, 거대한 빌딩 숲 속에서 묵묵히 자신만의 호흡을 지켜내는 ‘삶의 진짜 온도’를 보여줍니다.

오후, 골목의 이야기와 정체성의 공간

점심 무렵 캄풍바루는 또 다른 표정을 드러냅니다.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좁은 골목길을 따라 장난을 치며 뛰어놀고, 어머니들은 집 앞 그늘에 앉아 천을 꿰매거나 고추를 손질하며 담소를 나눕니다. 바람이 통하는 마루에는 빨래가 널려 있고, 작은 세탁소와 옷 수선 가게 앞에는 이웃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서로의 일상을  공유합니다. 캄풍바루의 골목은 단순한 이동 통로가 아니라, 이야기를 담는 ‘사회적 공간’입니다. 오래된 나무 벤치는 언제든 누군가를 앉게 하고, 시간은 여기서 흐르기보다 쌓입니다. 마을엔 여전히 ‘문을 잠그지 않는 문화’가 남아 있고, 이름을 부르는 대신 “이웃”이라는 정체성으로 연결됩니다. 일부 가정은 집 앞마당에 허브를 심고, 아이들은 그걸 따다 음식에 넣으며 자연스럽게 요리를 배웁니다. 요즘은 젊은 세대가 앞장서서 전통을 온라인으로 기록하거나 투어 프로그램을 기획합니다. 마을 투어에서는 음식, 건축, 일상의 규범까지 ‘살아 있는 문화’를 직접 보여주며 외부인과의 교류를 시도합니다. 캄풍바루의 골목은 단지 과거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선택지이며 새로운 말레이시아 도시정체성의 실험장입니다. 이 정체성은 산업화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도시 속에서 뿌리내리는 문화적 실천입니다.

해 질 녘, 개발의 그림자와 공동체의 의지

해가 기울면 마을은 다시 조용해집니다. 하지만 그 정적 이면에는 거대한 외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최근 수년간 캄풍바루는 여러 차례 정부 주도의 재개발 논의에 직면했습니다. 일부는 이미 철거되어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고, 몇몇 가옥은 장기간 방치되거나 상업시설에 밀려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주민들의 대응은 단순한 반대 운동이 아닙니다. “우리 마을은 건물이 아니라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신념 아래, 이들은 공동 토지 소유 형태를 유지하거나, 마을 기반의 경제활동을 직접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부 주민은 전통음식 클래스, 건축 워크숍, 마을 기록 다큐멘터리를 통해 외부와의 연결을 넓혀가고 있으며, 캄풍바루의 삶을 단순히 낭만적 과거가 아닌 ‘현재에도 가능한 삶’으로 재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도시개발 논리에 대한 완곡한 저항이자, ‘삶의 질’과 ‘속도’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문화운동이기도 합니다. 저녁이 되면 마을 회관 앞에 불이 켜지고, 주민들이 함께 모여 마당에서 식사를 나눕니다. 이 식탁은 단지 밥을 먹는 자리가 아니라, 하루를 나누고 내일을 약속하는 장소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진짜 공동체의 의미를 마주하게 됩니다. 캄풍바루는 오늘도 ‘사라지지 않기 위해 살아가는’ 공간입니다. 이것이 바로 도시 속 느린 마을의 의지입니다.


캄풍바루는 도시 안의 유물이나 관광지가 아닙니다. 이곳은 ‘여전히 사람이 살아가는 전통’이며, 쿠알라룸푸르의 변화 속도가 빠를수록 더욱 빛나는 느린 공간입니다. 낡은 나무마루 위를 맨발로 걷는 사람들, 마당에 앉아 하루를 이야기하는 가족들, 이웃이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는 풍경은 지금의 도시에서 점점 사라져 가는 장면들입니다. 우리는 때로 오래된 것에서 미래를 배웁니다. 캄풍바루는 우리에게 그런 가능성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그곳에서의 하루는 단지 과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어떤 도시에서 살아갈 것인지를 묻는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