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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히티, 문명에서 벗어난 예술의 유배지

by parttime1 2025. 10. 11.

타히티의 전경
타히티의 전경

 

 

남태평양의 한가운데, 타히티 섬은 수천 킬로미터의 바다로 둘러 싸인 채 세상과 단절되어 있다. 그러나 그 고립이야말로 이곳을 특별하게 만든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화가 폴 고갱은 이 섬으로 향했다. 파리의 예술계와 산업 문명에 염증을 느낀 그는 “진짜 인간의 삶”을 찾아 문명으로부터 스스로를 유배시켜 버렸다. 타히티는 그에게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인간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실험의 장소였다. 그가 남긴 말처럼 “나는 원시 속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오늘날 타히티는 그의 그림 속 색채처럼 찬란하지만, 그 속에는 식민지의 그림자와 예술가의 고독이 동시에 깃들어 있다.

문명을 떠난 고갱, 타히티로의 도피

폴 고갱이 타히티로 떠난 것은 단순한 충동이 아니었다. 당시 파리의 예술계는 인상주의에서 상징주의로 넘어가던 혼란의 시기였고, 고갱은 점점 자신이 설 자리를 잃어갔다. 가족과의 관계도 무너졌으며, 물질 중심의 도시 생활은 그의 예술적 본능을 질식시키고 있었다. 그는 “문명의 허위로부터 도망치겠다”며 배를 탔다. 타히티에 도착한 그는 섬의 원주민 마을에서 집을 짓고, 현지 여성들과 교류하며 파리에서와는 전혀 다른 리듬으로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의 붓끝은 서양의 시각 규범을 벗어나 자유로워졌다. 그가 그린 ‘타히티의 여인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같은 작품에는 문명사회에서 잃어버린 본능적 삶에 대한 갈망이 담겨 있다. 하지만 이 자발적 유배에 낭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갱은 건강이 악화되고, 프랑스 식민 당국과 마찰을 겪으며 점차 고립되었다. 그의 시도는 예술가로서의 자유 선언이었지만, 동시에 서구 제국주의의 시선이 타인의 문화를 소비하는 아이러니를 드러내기도 했다. 타히티는 그에게 자유의 땅이자, 또 다른 형태의 감옥이었던 셈이다.

낙원의 이면: 식민과 예술의 경계

타히티를 낙원으로 그린 서양인들은 많았지만, 그 이면에는 식민지라는 현실이 존재했다. 18세기부터 프랑스의 영향권에 있던 폴리네시아는 유럽식 제도와 종교가 강제로 이식된 공간이었다. 고갱이 도착했을 당시 이미 원주민 사회는 상당히 변형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본 원초적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으려 했다. 그러나 그가 그린 여성상들은 실제 여성들의 삶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들의 신앙과 일상은 식민 정책과 선교의 통제 아래 있었고, 고갱은 그 안에서 “순수함”을 찾아내려 했다. 이 지점이 바로 타히티 이야기가 단순한 예술가의 낭만으로 그치지 않는 이유다. 그의 ‘자발적 유배’는 자유의 추구이자, 동시에 서구 문명인이 타인을 그들의 시선으로 재현하는 한계의 기록이었다. 오늘날 타히티를 찾는 여행자들은 이 사실을 점점 더 의식한다. 파페에테의 고갱 미술관이나 마타이아 산책로에서는 그의 삶을 예술로 미화하기보다는, 그 속의 모순과 질문을 함께 보여준다. “자유를 찾으려는 인간의 욕망”과 “타인을 이상화하려는 시선”이 공존하는 공간, 그것이 지금의 타히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갱이 남긴 예술적 유산은 타히티의 문화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을 통해 전 세계 사람들은 폴리네시아의 색채와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고, 현지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동기를 얻었다. 예술과 식민의 복잡한 교차가 이 섬을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문화적 질문의 장소로 만들었다.

오늘의 타히티, 유배의 철학을 잇는 삶

오늘날의 타히티는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다. 물론 바다와 산호초, 꽃과 춤으로 가득한 풍경은 여행객을 매혹시키지만, 이 섬의 진짜 매력은 ‘속도의 부재’에 있다. 세상의 시계를 멈추게 하는 리듬, 그것이 타히티의 시간이다. 파페에테의 작은 카페에서는 여전히 고갱의 초상화가 걸려 있지만, 그곳의 사람들은 더 이상 그를 신화처럼 추앙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신화를 되찾고, 문화적 주체로서 서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타히티의 예술가들과 장인들은 나무 조각, 타파 천, 전통 무늬 문신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새롭게 표현한다. 이들은 “고갱이 그린 타히티”를 넘어서 “우리가 사는 타히티”를 이야기한다. 섬의 북서부 마을 파파라에서는 공동체 기반의 예술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젊은 세대는 디지털 아트로 폴리네시아 신화를 재해석한다. 이렇듯 타히티의 유배는 끝나지 않았다. 단지 개인의 유배가 공동체의 자각으로 바뀐 것이다. 고갱이 떠난 지 한 세기가 지났지만, 그의 자발적 유배는 이제 이곳 사람들의 문화적 자립으로 이어지고 있다. 여행자들이 이 섬을 찾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화려한 휴양이 아니라, ‘고립 속의 자유’를 느끼기 위해. 타히티는 여전히 세계의 소음을 피하고 싶은 이들에게 ‘내면의 유배’를 선물하는 섬이다.

 

타히티는 예술가의 도피처이자, 인간의 본능과 자유에 대한 실험장이었다. 고갱의 그림이 남긴 빛과 그림자 속에는, 문명과 자연, 자유와 고독이 교차한다. 오늘날 이 섬은 그 유산을 관광 자원으로 소비하기보다, 그 의미를 재해석하며 스스로를 탈바꿈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타히티는 단순한 남태평양의 낙원이 아니라, ‘인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묻는 영원한 질문의 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