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양양군 손양면은 인구 2천 명도 채 되지 않는 작은 농어촌 마을입니다. 이곳 한가운데에는 오래된 폐교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과거 '어성초등학교'로 불렸던 이 건물은 학생 수 감소로 2009년에 문을 닫았지만, 지금은 '손양 작은 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열고 있습니다. 잊혀진 공간이 마을의 문화 중심으로 탈바꿈한 이 사례는 단순한 건물 활용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이 글은 그 공간이 가진 변화의 서사, 주민과 공간이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기록한 것입니다.
교실은 사라졌지만 책은 남았다
폐교가 된 지 10여 년이 흐른 후, 마을 주민들과 귀촌 청년들은 이 공간을 도서관으로 바꾸자는의견에 뜻을 하나로 모았습니다. 더 이상 수업은 없지만, 그 안에 ‘지식’과 ‘기억’을 담을 수는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교사동 한 동을 개조해 책장이 들어섰고, 아이들이 공부하던 책상은 읽기 테이블로 다시 쓰였습니다. 원래의 검은 칠판과 낡은 나무문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공간의 과거를 지우지 않고 새로운 기능을 덧입히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도서관에는 지역주민이 기증한 책뿐 아니라 외부 독서모임, 서울의 독립서점, 강릉의 도서관 네트워크 등이 기증한 다양한 책들이 꽂혀 있습니다. 문학, 인문, 지역 기록, 농사, 생태, 어린이책까지 분야도 폭넓습니다. 책마다 기증자 이름이 붙어 있고, 책장 옆에는 ‘당신의 책이 누군가의 하루를 바꿉니다’라는 작은 문구가 걸려 있어서 도서관 이용자로 하여금 책을 추천하고 싶어 지게 만듭니다,
운영은 자원봉사자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정식 사서가 배치된 것은 아니지만, 마을에서 은퇴한 교사와 귀촌한 청년들이 함께 교대 근무를 한다. 주민 누구나 책을 빌릴 수 있고, 외지 여행자도 이용 가능하다. 오후 2시부터 6시까지는 정기 개방 시간이며, 행사나 모임이 있을 때는 야간에도 문을 연다. 책은 도구이자 매개체이며, 이 마을에서는 그것이 공간을 살리는 매개로 작동하고 있다.
폐교가 간직한 시간, 그 위에 쌓이는 이야기
어성초등학교는 1958년에 설립되어 한때는 전교생 200명을 넘기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농어촌 인구 감소와 도시화로 인해 학생 수는 급감했고, 결국 폐교라는 결정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폐교 이후 건물은 방치되어 있었지만, 지역 주민들은 이 공간을 ‘비워두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학교는 단지 배움의 공간이 아니라, 투표소, 마을 회관, 주민모임 공간으로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장소였기 때문이다. 2018년, 마을회 주도로 폐교 재생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고, ‘작은도서관’이라는 현실적인 대안이 제시되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지자체의 소규모 지원, 마을 자치회의 공동 출자, 지역 청년들의 인건비 없는 노력으로 기초 리모델링이 시작되었습니다. 페인트칠과 바닥 정리는 주민들이 직접 했고, 책장은 인근 목공방에서 기증받았습니다. 도서 기증 캠페인은 SNS와 입소문을 통해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도서관 개관식 날에는 마을 어르신, 초등학교 졸업생, 새로 귀촌한 가족들, 외지에서 온 기증자들까지 함께 모였습니다. 누군가는 30년 전 여기서 수업을 받았고, 누군가는 처음 이 마을에 발을 들인 날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시공간의 사람들이 하나의 공간에서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이 도서관은 더 이상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장소로 재탄생했습니다.
책 보다 사람이 중심이 되는 공간
손양 작은 도서관은 단순한 도서 열람 공간이 아닙니다. 매주 목요일 오후에는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 낭독 모임이 열립니다. 고등학생은 독후감 쓰기 대신 마을 어르신에게 스마트폰 사용법을 알려주는 활동으로 봉사 시간을 채웁니다.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북클럽은 마을 주민과 외부 참가자가 함께 참여하며, 책이라는 소재를 넘어 마을의 문제와 삶의 고민을 공유하는 자리로 이어집니다. 또한 이곳은 작은 전시와 워크숍이 가능한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강릉과 양양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진작가의 마을 기록 전시회가 열렸고, 지역 농산물을 활용한 천연염색 수업도 시작되었습니다. 도서관은 단순한 문화소비가 아닌, 창작과 나눔, 교류의 플랫폼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여행자에게도 이 공간은 매력적입니다. 캠핑을 온 가족이 들러 아이와 함께 책을 읽고, 커피를 나눠 마실 수 있습니다. 도서관 뒤편에는 마을 주민이 만든 작은 텃밭과 야생화 정원이 조성되어 있고, 누구나 앉아 쉴 수 있는 나무 벤치가 있습니다. 공간은 작지만 풍경과 기능, 관계와 기억이 조밀하게 연결된 구조입니다.
사라진 학교는 쉽게 잊혀지지만, 그 자리에 남은 건물과 기억은 여전히 많은 것을 품고 있습니다. 손양 작은 도서관은 폐교가 도시의 외곽으로 밀려난 실패의 상징이 아니라, 공동체가 공간을 다시 정의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시도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입니다. 이곳은 더 이상 아이들의 발걸음이 가득한 교실이 아니지만, 책을 통해 아이와 어른, 여행자와 주민이 만나고, 기억과 시간이 교차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책장이 아니라 삶이 쌓이는 도서관, 과거를 지우지 않고 품은 채 앞으로 나아가는 마을. 이것이 손양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조용하고 진실한 여행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