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웨일스와 잉글랜드의 경계에 자리 잡은 작은 도시 헤이온와이(Hay-on-Wye)는 ‘책의 도시’라는 별명으로 전 세계 여행자들의 발길을 이끌고 있습니다. 인구는 채 2천 명이 되지 않지만, 헌책방만 수십 개가 모여 있고, 매년 여름에는 세계적인 문학 축제인 ‘헤이 페스티벌(Hay Festival)’이 열립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여행지가 된 이유는 단순히 헌책방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책이 어떻게 도시의 정체성과 경제, 그리고 사람들의 삶을 바꾸었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는 헤이온와이가 어떻게 책을 통해 살아남고, 다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헌책방이 만든 도시 경제의 기적
헤이온와이가 지금과 같은 ‘책의 도시’가 된 것은 1960년대 초반, 한 명의 사업가가 시작한 실험에서 비롯됩니다. 리처드 부스(Richard Booth)는 런던과 미국 등지에서 헌책을 모아와 헤이온와이에 대형 헌책방을 열었습니다. 당시 지역 경제는 침체되어 있었고, 농업 외에는 뚜렷한 생계 기반이 없던 도시가 책이라는 새로운 자원을 통해 활력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후 그를 따라 여러 상인이 헌책방을 열었고, 작은 도시 전체가 거대한 서점처럼 변모했습니다. 오늘날에도 헤이온와이에서는 희귀본부터 값싼 문고본까지 다양한 책을 만날 수 있으며, 골목마다 개성 있는 서점이 줄지어 있어 걷는 즐거움이 큽니다. 이 헌책방 네트워크는 단순히 책을 사고파는 시장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마을 사람들은 서점 운영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고, 여행자들은 책을 사며 도시의 경제를 지탱하는 순환 구조를 만듭니다. 헌책 한 권이 곧 도시의 생명줄 역할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는 다른 관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념품 소비와는 완전히 다른 경험을 제공합니다. 여행자는 자신만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골라가고, 도시는 그 선택을 통해 다시 활기를 얻습니다. 헤이온와이가 ‘책의 도시’로 불리며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바로 이 책 중심 경제의 힘 덕분이었습니다.
문학 축제가 만든 세계적 명성
헌책방만으로도 충분히 독특했지만, 헤이온와이가 진정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계기는 ‘헤이 페스티벌’입니다. 1988년에 시작된 이 문학 축제는 초기에는 소규모였지만, 지금은 세계적인 작가와 예술가들이 찾아오는 국제 행사가 되었습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이곳을 ‘마음의 우드스톡’이라 부르며 유명해졌고, 매년 1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아옵니다. 헤이 페스티벌은 단순히 책을 전시하거나 판매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작가와 독자가 직접 대화를 나누고, 강연과 토론, 공연과 전시가 어우러지며 문학이 사회와 어떻게 만나는지 보여주는 무대입니다. 예를 들어, 기후 변화, 젠더, 정치 같은 주제들이 문학과 연결되어 논의되고,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도 운영됩니다. 이런 행사들은 책이 단순한 지식 전달 매체가 아니라 사회적 대화와 연결의 도구임을 드러냅니다. 축제가 열리는 동안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무대로 바뀝니다. 서점과 카페, 도서관, 임시 텐트까지 모두 축제의 일부가 되고, 주민들은 자원봉사자와 운영진으로 참여합니다. 문학 축제가 단순한 관광 이벤트가 아니라 지역 공동체와 깊이 결합된 문화적 자산이 되는 순간입니다. 책이 도시의 일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 헤이 페스티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상의 풍경과 살아 있는 책의 문화
헤이온와이가 특별한 이유는 헌책방과 축제만이 아닙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책과 함께하는 문화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도시에서는 버려진 성의 벽이나 공공장소에도 ‘무인 헌책방’이 설치되어 있어, 누구나 동전을 넣고 책을 가져갈 수 있습니다. 책을 판매하는 행위가 상업적인 차원을 넘어, 책을 나누는 문화적 관습으로 정착한 것입니다. 골목의 카페에서는 책을 읽는 손님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서점 주인들은 단순한 판매자가 아니라 책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는 해설자 역할을 합니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이 책과 가까이하는 풍경은 인상적입니다. 도시 자체가 거대한 도서관처럼 기능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책 속에서 성장합니다. 이는 지역 공동체가 세대를 넘어 책 문화를 전승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또한 여행자에게는 단순한 방문을 넘어, 책을 매개로 현지인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서점에서 만난 주인과의 대화, 축제에서 작가와 나눈 토론, 벼룩시장에서 발견한 낡은 책 속 메모는 그 도시만이 줄 수 있는 독특한 추억이 됩니다. 헤이온와이는 이처럼 ‘책이 살아 있는 도시’입니다. 책이 도시 경제를 살리고, 문학 축제가 도시의 브랜드를 만들며, 일상의 풍경마저 책과 함께 엮여 있습니다. 그 결과 이 도시는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책을 통해 사람과 세계를 연결하는 특별한 장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헤이온와이는 작은 도시가 어떻게 책을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얻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헌책방이 만든 경제, 문학 축제가 불러온 세계적 교류, 그리고 일상 속에 스며든 책의 문화는 책 애호가뿐 아니라 모든 여행자에게 특별한 영감을 줍니다. 여행자가 이곳을 찾는 이유는 단순히 책을 사기 위함이 아닙니다. 책을 매개로 한 도시의 삶과 문화,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헤이온와이는 지금도 여전히 ‘책의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은 매력을 간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