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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과 바다 사이에 피어난 상필리페의 와인이야기

by parttime1 2025. 8. 15.

포고섬 상필리페의 와인
포고섬 상필리페의 와인

 

대서양 한가운데 자리한 카보베르데 포고(Fogo) 섬의 서쪽 해안, 그 푸른 절벽 위에 상필리페(São Filipe)가 있습니다. 이 도시는 단순한 항구가 아닙니다. 수 세기 동안 화산과 바다의 은총을 받으며, 때로는 재앙을 견디고 다시 일어서며, 독특한 와인 문화와 강인한 공동체 정신을 키워 온 곳입니다. 이곳을 방문하면 단순히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화산재와 바람, 사람의 손이 함께 빚어낸 레지리언스(resilience)의 서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화산 토양과 포도 재배의 역사

포고 섬의 와인 이야기는 19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카보베르데는 커피 수출로 유명했지만, 포고섬의 일부 농부들은 화산재 토양이 포도 재배에 이상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분화구 주변의 토양은 검고 거칠지만, 미네랄이 풍부하고 배수가 잘되며 낮과 밤의 기온차가 커 포도에 복합적인 향을 부여했습니다. 이 덕분에 'volcanic viticulture'(화산 포도 재배)라는 독특한 농법이 자리 잡게 되었죠.

현지에서 가장 널리 재배되는 품종은 샤(Cha)와 모스카텔(Moscatel)입니다. 샤는 적포도 품종으로 진한 루비색과 흑후추, 블랙체리 향이 특징이며, 모스카텔은 스파이시한 단맛과 오렌지 껍질 향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샤 포도는 포고 화산 특유의 토양 덕분에 강한 미네랄리티와 은은한 훈연 향을 품게 됩니다. 이는 다른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테루아(terroir)입니다.

포도밭은 대부분 해발 1,000~1,600m 사이의 분화구 내·외곽 경사지에 있습니다. 현무암 자갈 위에 얇은 화산재층이 덮인 이 땅은 뿌리가 깊게 내려야만 수분과 영양분을 얻을 수 있어, 포도나무의 생장 속도는 느리지만 그만큼 알이 작고 과육이 치밀합니다. 여기에 해풍이 염분을 살짝 더해, 와인에 바다의 향을 남깁니다.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포도나무 뿌리 진딧물(필록세라) 피해가 심각했을 때, 포고섬의 포도밭은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 덕분에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당시 유럽 품종의 ‘유전자은행’ 역할을 했고, 일부 묘목이 다시 유럽으로 역수출되기도 했습니다. 상필리페 주민들은 이 전통을 지금까지 이어오며, 와인 생산을 단순한 경제 활동이 아닌 문화유산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분화구 공동체의 재건과 생활

포고 화산은 혜택만 주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20세기 들어서도 여러 차례 분화가 있었고, 특히 1951년과 2014~2015년의 대규모 폭발은 마을과 포도밭을 크게 파괴했습니다. 분화구 안의 ‘차 다스 칼데이라스(Chã das Caldeiras)’ 마을은 용암에 뒤덮였고, 주민 수백 명이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자 사람들은 다시 화산 기슭으로 돌아왔습니다.

재건은 단순한 복구가 아니었습니다. 주민들은 기존의 주거 형태를 개선해, 현무암 벽체와 금속 지붕을 결합한 내열 구조를 도입했습니다. 포도밭 복원에는 지역 공동체가 함께 참여했고, 새로운 관개 시설과 병충해 방지 시스템을 설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외부 원조보다 주민들의 자발적 노동과 자금이 더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일상생활은 여전히 화산과 맞닿아 있습니다. 아침이면 아이들이 분화구 주변을 따라 학교에 가고, 낮에는 농부들이 포도밭에서 잡초를 뽑거나 용암석을 치웁니다. 오후가 되면 마을 광장에서 커피와 와인을 곁들인 대화가 이어지고, 저녁이면 대서양 너머로 지는 해를 보며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화산은 여전히 위험하지만, 그 위에 삶을 쌓아 올리는 방식은 이미 이 공동체의 정체성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생활 방식은 ‘레지리언스 관광’(resilience tourism)이라는 새로운 관광 트렌드와 맞닿아 있습니다. 여행자는 단순한 경관 감상이 아니라, 화산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직접 보고 듣습니다. 분화구 트레킹 중에는 포도밭 주인이 직접 가이드를 맡아, 자신의 밭이 어떻게 용암 속에서 다시 태어났는지 들려줍니다. 이는 여행자에게 단순한 감탄을 넘어,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남깁니다.

와인·관광 융합 모델

상필리페와 포고섬의 와인 산업은 이제 관광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포고 와인 루트(Fogo Wine Route)’라 불리는 코스는 상필리페 시내에서 시작해 분화구 마을을 거쳐 주요 포도밭과 와이너리를 방문합니다. 각 와이너리에서는 재배 과정과 와인 양조를 설명하고, 시음회를 열어 여행자들이 직접 테루아를 맛볼 수 있도록 합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와인 생산과 마을 재건 프로젝트가 하나의 모델로 통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와이너리 투어 수익금 일부는 주택 복원, 학교 유지, 도로 보수에 사용됩니다. 이를 통해 여행자가 지불하는 비용이 단순 소비로 끝나지 않고, 지역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기여하게 됩니다. 관광 상품의 다양화도 활발합니다. 와인 페어링 디너, 화산재 빵과 현지 치즈를 곁들인 피크닉, 수확철 포도 따기 체험 등은 여행자가 현지 문화와 더 깊게 연결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포고섬의 요리에는 해산물과 화산 토양에서 자란 채소가 어우러져, 와인과의 조합에서 놀라운 조화를 이룹니다.

상필리페 시 정부와 생산자 협회는 ‘관광으로 보존을 유지하고, 보존이 관광의 가치를 높인다’는 철학을 공유합니다. 이들은 대규모 리조트 개발보다 기존 건축물 개조와 소규모 숙박 시설 확충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도시의 역사적 경관을 유지하면서도 관광 수익을 지역에 환원시키는 선순환 구조를 실현하고 있습니다.

 

상필리페는 화산재 위에 세워진 단단한 도시이자, 와인 잔 속에서 그 이야기를 전하는 장소입니다. 포도밭의 흙 한 줌에는 수백 년의 역사와 분화의 흔적, 그리고 다시 일어선 사람들의 땀이 스며 있습니다. 관광객은 이곳에서 단순한 휴양 이상의 것을 얻어갑니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들어낸 복합적인 서사이며, 한 잔의 와인에 응축된 삶의 향기입니다.

만약 대서양 한가운데서 색다른 여행을 찾고 있다면, 상필리페를 향해 보세요. 그곳에서는 바다와 화산, 그리고 한 모금의 와인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