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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 아이트벤하두, 흙벽 마을이 세계 영화 속으로 모로코의 마라케시에서 남쪽으로 약 180km, 아틀라스 산맥의 비탈길을 넘으면 모래빛 성벽과 탑이 이어지는 마을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이곳이 바로 아이트벤하두(Aït Benhaddou). 11세기부터 형성된 카스르(ksar, 전통 흙벽 요새 마을)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지금은 세계적인 영화 촬영지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글래디에이터’, ‘왕좌의 게임’, ‘미션 임파서블’ 같은 작품 속 배경으로 등장하며 수많은 여행자를 끌어모았습니다. 그러나 화려한 스크린 속의 명성 뒤에는 전통 보존과 상업화 사이의 미묘한 긴장이 존재합니다.카스르의 역사·건축학적 특성아이트벤하두의 카스르는 흙과 짚, 돌을 섞어 만든 전통 건축물로, 사하라 사막과 아틀라스 산맥 사이의 교역로를 지키는 요새 역할을 해.. 2025. 8. 17.
마다가스카르 일 드 생트마리, 해적의 섬에서 고래의 섬으로 마다가스카르 동해안, 인도양의 푸른 물결 속에 길고 가느다란 섬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현지어로는 노시 보라하(Nosy Boraha), 프랑스어로는 일 드 생트마리(Île Sainte-Marie). 이곳은 한때 17~19세기 해적들의 아지트였고, 지금은 매년 남극에서 찾아오는 혹등고래들의 쉼터입니다. 바람의 방향과 해류의 흐름, 사람의 발길과 고래의 숨결이 교차하는 이 섬은, 역사·생태·관광이 한 자리에서 맞물리는 드문 공간입니다.역사적 항로·해적 유산의 흔적일 드 생트마리의 해적 이야기는 17세기 말부터 시작됩니다. 당시 인도양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무역의 중심 항로였고, 수많은 상선이 향신료·금·비단을 싣고 지나다녔습니다. 섬 주변의 얕은 바다와 복잡한 산호초 지형은 대형 군함이 접근하기 어렵게 만.. 2025. 8. 16.
화산과 바다 사이에 피어난 상필리페의 와인이야기 대서양 한가운데 자리한 카보베르데 포고(Fogo) 섬의 서쪽 해안, 그 푸른 절벽 위에 상필리페(São Filipe)가 있습니다. 이 도시는 단순한 항구가 아닙니다. 수 세기 동안 화산과 바다의 은총을 받으며, 때로는 재앙을 견디고 다시 일어서며, 독특한 와인 문화와 강인한 공동체 정신을 키워 온 곳입니다. 이곳을 방문하면 단순히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화산재와 바람, 사람의 손이 함께 빚어낸 레지리언스(resilience)의 서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화산 토양과 포도 재배의 역사포고 섬의 와인 이야기는 19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카보베르데는 커피 수출로 유명했지만, 포고섬의 일부 농부들은 화산재 토양이 포도 재배에 이상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분화구 주변의 토양.. 2025. 8. 15.
수도원과 장인이 숨쉬는 프랑스 상필리에 프랑스 옥시타니 지역 오드(Aude) 주의 들판 한가운데, 상필리에(Saint-Papoul)는 지도를 비집고 들어온 작은 이름이지만 마을 전체가 조용한 박물관처럼 느껴집니다. 수도원이 씨앗이 되어 자란 마을은 장인들의 손끝에서 오늘까지 이어졌고, 성당의 종소리와 공방의 망치 소리가 섞인 일상이 여행자에게 스며듭니다. 빠르게 훑어보는 관광과는 어울리지 않는 곳, 대신 천천히 걸을수록 깊어지는 이야기들이 골목마다 겹겹이 놓여 있습니다. 이 글은 수도원이 어떻게 마을을 만들었는지, 장인 문화가 어떻게 현재로 이어졌는지, 그리고 상필리에가 선택한 지속가능한 관광의 방식이 무엇인지 차분히 살펴봅니다.수도원이 만든 마을의 탄생과 변화상필리에는 8~9세기경 세워진 베네딕트회 수도원에서 출발했습니다. 오늘날 ‘상필리에.. 2025. 8. 14.
구리와 목재로 빚은 노르웨이 뤼로스의 시간 노르웨이 중부의 고원지대에 자리한 뤼로스(Røros)는 지도를 덮을 만큼 크진 않지만, 시간을 고요히 축적해 온 도시입니다. 차가운 바람과 긴 겨울이 일상의 대부분인 이곳에서 사람들은 구리와 목재로 삶을 지탱했고, 그 결과는 산업사와 생활사가 촘촘히 맞물린 독특한 풍경으로 남았습니다. 이 글은 구리광업이 남긴 도시의 골격, 목재 건축을 지키는 기술과 태도, 그리고 과거를 소중히 품은 채 내일을 준비하는 지속가능한 정책을 차분히 따라가 봅니다.17~19세기 구리광업의 도시 형성뤼로스의 시작점은 164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농부 한스 올슨 아세(Hans Olsen Aasen)가 산비탈에서 녹청석을 발견하면서 마을의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노르웨이 왕실은 즉시 광산 개발 권리를 승인했고, ‘뤼로스 구리 회.. 2025. 8. 13.
은빛 제국의 명암, 포토시의 시간 여행 볼리비아 안데스 산맥의 4,000미터 고지대에 자리한 포토시(Potosí)는 단순한 도시 이상의 존재였습니다. 16세기 중반, 세로 리코(Cerro Rico)라 불리는 산에서 쏟아져 나온 은은 스페인 제국의 금고를 채우고, 유럽 경제의 심장을 뛰게 했으며, 심지어 중국 명나라의 화폐 유통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 도시에서 채굴된 자원이 지구 반대편의 물가를 흔든 이례적인 역사는 세계 경제사에서도 드문 사례입니다. 하지만 이 영광의 그림자에는 수많은 노동자의 목숨과 환경 파괴, 문화의 상흔이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오늘날 포토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지만, 그 내부는 여전히 채굴의 손길과 생계의 고민 속에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한데 얽힌 포토시의 이야기는 여행자를 단순한 관.. 2025. 8.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