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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과 바다 사이에 피어난 상필리페의 와인이야기 대서양 한가운데 자리한 카보베르데 포고(Fogo) 섬의 서쪽 해안, 그 푸른 절벽 위에 상필리페(São Filipe)가 있습니다. 이 도시는 단순한 항구가 아닙니다. 수 세기 동안 화산과 바다의 은총을 받으며, 때로는 재앙을 견디고 다시 일어서며, 독특한 와인 문화와 강인한 공동체 정신을 키워 온 곳입니다. 이곳을 방문하면 단순히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화산재와 바람, 사람의 손이 함께 빚어낸 레지리언스(resilience)의 서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화산 토양과 포도 재배의 역사포고 섬의 와인 이야기는 19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카보베르데는 커피 수출로 유명했지만, 포고섬의 일부 농부들은 화산재 토양이 포도 재배에 이상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분화구 주변의 토양.. 2025. 8. 15.
수도원과 장인이 숨쉬는 프랑스 상필리에 프랑스 옥시타니 지역 오드(Aude) 주의 들판 한가운데, 상필리에(Saint-Papoul)는 지도를 비집고 들어온 작은 이름이지만 마을 전체가 조용한 박물관처럼 느껴집니다. 수도원이 씨앗이 되어 자란 마을은 장인들의 손끝에서 오늘까지 이어졌고, 성당의 종소리와 공방의 망치 소리가 섞인 일상이 여행자에게 스며듭니다. 빠르게 훑어보는 관광과는 어울리지 않는 곳, 대신 천천히 걸을수록 깊어지는 이야기들이 골목마다 겹겹이 놓여 있습니다. 이 글은 수도원이 어떻게 마을을 만들었는지, 장인 문화가 어떻게 현재로 이어졌는지, 그리고 상필리에가 선택한 지속가능한 관광의 방식이 무엇인지 차분히 살펴봅니다.수도원이 만든 마을의 탄생과 변화상필리에는 8~9세기경 세워진 베네딕트회 수도원에서 출발했습니다. 오늘날 ‘상필리에.. 2025. 8. 14.
구리와 목재로 빚은 노르웨이 뤼로스의 시간 노르웨이 중부의 고원지대에 자리한 뤼로스(Røros)는 지도를 덮을 만큼 크진 않지만, 시간을 고요히 축적해 온 도시입니다. 차가운 바람과 긴 겨울이 일상의 대부분인 이곳에서 사람들은 구리와 목재로 삶을 지탱했고, 그 결과는 산업사와 생활사가 촘촘히 맞물린 독특한 풍경으로 남았습니다. 이 글은 구리광업이 남긴 도시의 골격, 목재 건축을 지키는 기술과 태도, 그리고 과거를 소중히 품은 채 내일을 준비하는 지속가능한 정책을 차분히 따라가 봅니다.17~19세기 구리광업의 도시 형성뤼로스의 시작점은 164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농부 한스 올슨 아세(Hans Olsen Aasen)가 산비탈에서 녹청석을 발견하면서 마을의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노르웨이 왕실은 즉시 광산 개발 권리를 승인했고, ‘뤼로스 구리 회.. 2025. 8. 13.
은빛 제국의 명암, 포토시의 시간 여행 볼리비아 안데스 산맥의 4,000미터 고지대에 자리한 포토시(Potosí)는 단순한 도시 이상의 존재였습니다. 16세기 중반, 세로 리코(Cerro Rico)라 불리는 산에서 쏟아져 나온 은은 스페인 제국의 금고를 채우고, 유럽 경제의 심장을 뛰게 했으며, 심지어 중국 명나라의 화폐 유통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 도시에서 채굴된 자원이 지구 반대편의 물가를 흔든 이례적인 역사는 세계 경제사에서도 드문 사례입니다. 하지만 이 영광의 그림자에는 수많은 노동자의 목숨과 환경 파괴, 문화의 상흔이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오늘날 포토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지만, 그 내부는 여전히 채굴의 손길과 생계의 고민 속에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한데 얽힌 포토시의 이야기는 여행자를 단순한 관.. 2025. 8. 10.
바다결이 빚은 통영의 예술 지도 통영은 바다와 맞닿은 도시지만, 그 바다는 단순한 수평선이 아닙니다. 리아스식 해안이 만들어낸 굴곡진 포구와 섬들은 도시의 생활 방식과 문화, 그리고 예술의 형식을 규정해 왔습니다. 이 글에서는 통영의 지형적 특성이 어떻게 예술의 토양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 구조가 오늘날 통영을 예술도시로 자리 잡게 한 과정을 살펴봅니다.리아스식 해안이 만든 삶의 무대통영의 바다를 지도에서 보면, 단순한 해안선이 아닌 실핏줄 같은 곶과 만이 이어져 있습니다. 스페인의 갈리시아 해안과 유사한 이 리아스식 해안은 해안선이 길고 굴곡져 있어 수많은 포구를 품고 있습니다. 이런 지형은 단순히 어업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생활권을 형성하는데 적합했습니다. 통영의 어촌과 항구는 바다를 중.. 2025. 8. 9.
부산 산복도로 책방, 도시를 다시 읽다 부산 산복도로는 원래 도시의 변두리, 낙후된 주거지로 인식되던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 언덕길을 따라 작은 책방들이 하나둘 들어서며, 이곳은 조용히 문화의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습니다. 책이 도시를 다시 읽게 만들고, 사람과 장소가 새로운 관계를 맺는 이 거리에서 우리는 오래된 도시의 미래를 마주하게 됩니다. 이번 글에서는 산복도로 책방거리의 문화적 가치, 도시재생 사례로서의 의미, 그리고 책방이 어떻게 도시를 바꾸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풀어봅니다.산복도로라는 공간이 가진 도시적 맥락부산 산복도로는 도시가 급속히 확장되던 시기에 생겨난 급경사 지대의 주거 지역입니다. 6·25 전쟁 이후 피란민들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들이 밀집해 있으며, 그 당시의 구조가 지금도 대부분 유지되고 있습.. 2025. 8. 8.